에이프릴, 주인공의 이름부터 중의적이다.
4월의 따스함이 북극의 차가운 베어 아일랜드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라스트 베어’는 열한 살 아이의 시선에서
차분히 풀어낸다.
이름과는 다르게 곰이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 곳에서 만난 곰과
이름과는 다르게 엄마를 잃고 우울함을 숨기고사는 아이.
두 외로운 존재는 소통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슬픔은 어딜 가든 혜성의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듯했다(p92)
아빠가 화를 낸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엄마가 떠난 지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제 일 같아서야(p.105)
난...아빠가 날 보고 이렇게 웃어주면 좋겠어(p.143)
에이프릴의 외로움은 엄마를 잃은 그것이 아니다. 현재의 남은 가족인 아빠가 행복하고 더불어 자신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쉽사리 잊지 못하는 어른은 미성숙한 어른이라고 책망하거나 돌볼 아이가 있기에 행복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살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픔이란 전염성이 강해서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쉽게 전가된다.에이프릴의 고통을 돌봐줄 순 없었을까. 아이들은 슬픔을 표현함에 미숙할 뿐 슬프지 않다는 게 아닌데. 기특하게도 에이프릴은 그런 아빠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안다. 아빠도 딸에게 공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알다시피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는걸 제일 잘하거든. 나는 이제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p.184-185)
두 사람의 화해의 계기는 역시나 ‘곰’이다. 작가는 여기에 기후문제라는 큰 틀을 적절히 녹아냈다. 만년설이 녹아내려서 북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7년을 홀로 버틴 북극곰의 쳐지는 에이프릴의 외로움과 맞닿아있다. 북극곰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 그것이 에이프릴에게는 자신의 삶을 돌려받는 그것과 같지 않았을까.
아빤 항상 내가 아끼는 모든 걸 빼앗아 가요(p.192)
어른들은 가끔 과거에 사로잡혀 눈이 멀기도 한단다(p.242)
결국 아빠는 에이프릴이 아끼는 곰을 살렸다. 가족이란 그런 게 아닐까. 서로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한울타리의 공동체. 지구의 생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듬어야할, 멸종위기의 동물들도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돌봐야할 존재다. 곰이 에이프릴을 살리고 아빠는 곰을 살렸다. 그렇게 지구상의 생물들은 서로 어루만지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아빠와 에이프릴이 돌아왔을 때 에이프릴의 포효가 북극곰에게 다시한번 닿기를.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사랑하는 삶이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