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리뷰] 내 이름은 빨강 2
봄여름가을겨울 2023/05/0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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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빨강 2
- 오르한 파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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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을 향한 진실된 믿음의 차이점
예전부터 읽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왠지 잘 읽혀지지 않는 느낌 때문에 실패하다 최근 들어 완독했다.
중세 오스만제국의 화원에서 펼쳐지는 살인과 사랑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을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게끔 매 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첫 장은 누군가에게 살해된 자의 소개로 시작된다. 그는 화원에 소속된 금박이 세공사로서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카라는 1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사촌인 셰큐레를 깊이 사랑했으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고 상처를 안고 고향을 떠났었다.
10여년 전 카라의 사랑을 반대했던 에니시테는 술탄의 명령으로 특별한 화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화집의 금박이 세공을 담당했던 이가 죽자 일이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카라에게 살인자를 찾을 것을 부탁한다.
에니시테의 집에서 이러한 부탁을 받으며 셰큐레를 다시 보게 된 카라는 다시 한 번 셰큐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지게 되며 그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도 에니시테의 부탁을 수행하고자 한다.
술탄이 제작하는 화집에 신성한 교리를 거부하고 신을 배반하는 그림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돌만큼 그림들은 위험하고도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카라는 그 그림을 그리는 3명의 화원을 찾아가 그림을 향한 그들의 의지와 순수성을 시험하지만 살인자를 식별할 순 없었다.
그러다 결국 에니시테가 살인자에게 죽게 되고 살인자긴 가장 중요한 그림마저 훔쳐가자 술탄은 극대노하여 재무대신과 궁궐수비대장을 통해 카라와 궁중 화원장 오스만에게 반드시 그 살인마를 잡을 것을 명한다.
카라는 오스만과 함께 살인마의 단서를 쫓기 시작한다. 살인자가 전수받아온 역사성이 깃든 화풍을 추적하며 마침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고 피투성이 추격 끝에 살인마의 정체를 밝혀낸다.
살인자의 입장에서도 글이 전개되기 때문에 인상깊은 스릴러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이가 살인자가 아니어서 더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스릴러적인 부분과는 달리 이 소설은 무엇인가 더 심오한 메세지를 던져준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카라와 셰큐레, 셰큐레를 사랑하는 시동생 하산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신을 향한 숭고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정작 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옛날부터 대가라고 칭송되는 이들만의 화풍을 잇는 자들이 신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이들로 여겨졌고, 그들이 모범적인 화원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이다.
화원들은 절대로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해선 안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서도 안된다. 유럽의 화풍이 표방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원근법이나 사람이 그림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초상화 등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대상은 오직 신의 눈 아래에서만 있을 수 있고 이 세상의 중심이신 신만이 그림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화풍과 유럽의 화풍을 비교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는 것이 죄악이라고 2권에 걸쳐 설명하는 화원들의 논리가 난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상상력과 논리를 오로지 한 가지 특성에만 결부시키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의 종교적 특성이라고 이해하기에는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생각했을 때 그 때보다 더 불수용적이고 폐쇄적으로 악화됐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믿음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논리와 종교적 맹목성이 결합된 결과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용인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과연 자신의 뜻대로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옛 대가들의 화풍만을 따르라고 했을까? 신이 인류를 위해 여자는 남자의 종으로서 교육도 받아서는 안되고 오직 남편의 허락 하에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명했을까?
모든 것은 신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한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말들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유의지와 개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거꾸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종교적으로 위험한 일일까? 그것이 위험한 이유는 종교가 신을 향한 위로써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정치 및 자본과 권력관계를 맺기 위한 아래로써의 서열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통일성을 가져야하는 이유는 정치가와 자본가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다. 종교는 언제나 권력과 결탁해왔고 신이라면 용납하지 않을 일들도 신을 대신하는 이들답지 않게 해온 역사도 있다. 한마디로 피지배계층을 보다 편하고 쉽게 지배하기 위해 남용된 인간의 관념적인 산물이다.
나는 부처님을 믿는다. 전국의 사찰에 다니며 공양미, 기와불사, 소원등 달기를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이 활동들 모두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부처님께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부처님께 간절한 소원을 빌 때는 돈이 따라붙는다. 부처님은 부의 소유등급에 상관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하사하셨겠지만 인간은 욕망을 참을 수 없다. 나 또한 부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주실 거라는 욕망으로 자본을 지불하고 부처님께 소원이 실현되기를 빈다. 부처님께서 한낱 자본에 좌지우지되며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
사찰은 인간의 그러한 욕망을 이용하여 자본을 들인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소원등을 달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이 참 이상했다. 내가 아는 부처님은 자비로우신 신인데 왜 돈이 없으면 등을 달지 못하는 걸까?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등이 더 밝혀져야 하는게 아닐까? 성장하고 보니 부처님과 불교를 믿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님을, 불교가 사람들을 모으고 종교적 힘이 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신을 향한 믿음이 거북스러웠다. 신을 핑계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 신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눈을 바늘로 찔러 장님이 되는 인물, 나쁜 짓을 하고도 신이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인물 등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너무 쉽게 신을 찾으며 터져나온다. 이들은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종교에 기대어 자신들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신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신을 믿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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