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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정님의 서재

페미니스트 영문학자 리타 펠스키에 따르면, 의견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며 기꺼이 서로를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가진 생각에 의문을 품어보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낡은 생각을 폐기하는등의 융통성을 발휘해야만 페미니즘은 생명력 있는 이론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과도 언제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백래시 Back-lash(사회 변화에 대한 대중의 반발)‘라는 개념에 의존하면서 모든 비판을 반동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이러면 이견- P63
을 가진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다. 물론 앞에 쓴 것처럼 상대가 나를 파시스트나 ‘정부요원‘처럼 취급하는 상황에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시도는 쉽지 않다. 가짜뉴스와 사기 행각이 공론장을 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적 대화와 합리적 토론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들이 우리를 끌어내려도, 우리는 결코 같이 끌려 내려가지 않겠다는 마음이야말로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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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아내가,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이…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라는 멘트를 녹음해서 들려줬다.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고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화제성이 높았다. 이후 광고로도 만들어졌고, 좋은 광고로 뽑혀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이걸로 괜찮아졌을까? 이처럼 서로가 누군가의소중한 자식이고 가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서로를 존중할수 있다는 생각은 꽤 널리 퍼져 있다. 명절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의가족상봉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는 것도 비록 피부색과 언어는 달라도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므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왜 귀하게 기른 딸은 아르바이트 작업장에서 노동권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을까. 가족 안에서 귀애한 존재로 키워지는 것과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나도 너만 한딸이 있는데"라며 삿대질을 당하고, 내가 잘못하면 부모가 소환되며, 남편의 실수가 곧 아내의 흠이 된다. 가족은 존중의 근거가 아니라 협박의 조건이다. 한국 같은 고도의 가족 중심주의 사회에 신자유주의 패치가 설치된 결과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이해관계를추구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가족과의 연결감은- P74
사회적 연결감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실제로 콜센터 노동자에게가장 크게 와닿은 정책은 통화연결음이 아니라 업무중단권이었다. 성희롱과 폭언을 당했을 때 끊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자 스트레스 지수가 떨어졌다는 결과도 발표되었고, 다른 사업장에도 확장되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세계 속에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감각이 확고해질 때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사랑, 성, 가족에 대한 감각 역시 소유와 배타성에서 자유와 상호존중의 감각으로 바뀔 때 비로소 가족과 사회의 분할된 세계가 이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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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제압하고 손에서 불을 뿜으며 미사일을 요격하고 우주를 날다니는 여전 수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캡틴 마블〉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액션 신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는 쾌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슈퍼히어로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쾌락은 ‘마침내 자유로워진 순간‘이라는 감각을 전달할 때다. 가장 강한 순간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순간.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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