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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정님의 서재

유치원 면담에서 못 했던 말-장수연
라디오 PD, 에세이스트


선생님, 언제나 사랑으로 저희 아이를 돌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월에 입학할 땐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었는데, 이제는 집에서도 유치원의 규칙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양치질을 하거나 양말을 신더라고요.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며 많이 성장했음을 실감합니다. 선생님 한 분이 돌봐야 하는 아동 수가 10명이 훌쩍 넘고 행정 업무도 많아서 쉽지 않은 근로 환경일 텐데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려요.
그런데 선생님, 사실은 제가 면담 자리를 빌어서 꼭 여쭤보고 싶은게 있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이 유치원 졸업 사진을 찍는 날이었잖아요. 혹시 그때 여자 어린이들은 드레스를 입고 남자 어린이들은 턱시도를 입게 하셨나요? 한 명씩 돌아가면서 흰색 진주가 달린 긴 공주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고 아이가 이야기하더라고요, 유치원 졸업 사긴을 찍는데 드레스를 입게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졸업 사진 촬영은 유치원의 공식 행사인데, 여기서 아이들 전체가같은 옷을 입도록 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띠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사립 유치원이 아닌 병설 유치원, 그러니까 국가 공립 교육- P26
저는 아이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게, 네 마음의기관의 공적인 행사이니 더욱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 특정한 옷이 드레스였다는 게, 아이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지 부모로서 좀 신경이 쓰입니다. 한 해 동안의 유치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사진에 드레스를 입히신 게, 이 유치원의 교육 목표가 공주 양성인가?‘ 하는 오해를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좀 더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드레스를갈아입을 때, 남자 친구들도 다 같이 있는 곳에서 메리야스도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부끄러웠다고 저희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바쁘신 가운데,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면서 사진을 찍으셔야했던 상황이었으리라고 충분히 짐작됩니다만, 선생님, 그래도 좀 아쉽습니다. 어린이집 시절 유아 성교육 시간에, 그리고 가정 내에서도 저희아이는 몸의 소중한 곳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내 몸의 보호를 위해서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다‘ 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그 배움이 유치원에서, 선생님이라는 중요한 교육 권위자에 의해서 부정당한 셈이 된 거죠. 저는 이것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원래 알몸은 보여주지 않는 건데 유치원 선생님이 벗으라고할 때는 괜찮다고 해야 할까요?
고민 끝에, 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선생님이라고 해도 네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건 틀린 게 아니고, 오히려 부22러운 마음이 드는데 꾹 참고 선생님께 아무 이야기도 못 하는 게 용기없는 행동이라고 말이지요. 이제 졸업까지 얼마 남진 않았지만, 그사이에 혹시 저희 아이가 선생님이 지시하시는 어떤 단체 행동에 대해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아이의 의견을 한 번쯤 경청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P28
목소리를 잘 듣는 것이다. 네 마음이 아니라고하면, 선생님께 꼭 말씀드려라"고 가르치려고 하거든요.

유치원 면담을 앞두고, 나는 열심히 저 대사를 연습했다. 최대한 소리있게, 공격적이지 않게 말할 수 있도록 글로 적어본 문장들이었다. 드디어 실전의 날, 나는 긴장을 누르고 더듬더듬 질문을 꺼냈다. 선생님의 시선이 점점 ‘이상한 엄마를 만났구나‘ 하는 눈빛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고,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침묵이 나를 창피해하는 의미인가 싶어심장이 계속 쪼그라들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지만, 그래도 연습 덕분인지 꾸역꾸역 끝까지 준비한 말을 마칠 수 있었다.
우려한 것처럼 교실 안에서 모두가 보는 가운데 웃을 갈아입은 건아니었다고 한다. 파티션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남녀가 따로 갈아입었다는 얘기를, 그러니 문제될 게 없다는 뉘앙스에 실어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나는 과연 어른이었어도 그 정도의 가림막으로 옷을 갈아입었을까 생각했다. 옷가게나 병원의 피팅룸을 떠올려 보니 쉬웠다. 어른들은완벽히 시선이 차단된 밀폐된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옷을 갈아입길 원하면서 왜 어린이들에게는 ‘이 정도 가려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더 묻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현실적으로 유치원의 인력과 공간을 생각하니 여기서 더 하면 진짜 ‘진상 엄마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졸업 사진의 복장 문제는 좀 더 복잡했다. 이 유치원은 해마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졸업 사진을 찍어왔고, 다른 유치원들도 많이 그런다고 했다. 중요한 날 예복을 갖춰 입는 정도로 생각하니 이해가 가기도했다. 한복보다는 서양식 드레스를 더 좋아하는 요즘 부모들의 취향에맞춰 유치원에서 준비한 이벤트인 셈이다. 선생님 앞에서는 어버버 하- P28
다가 정해진 면담 시간이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아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드레스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다"라며 흥분해서 신나게 얘기할 때, 나는 왜 즉각 거부감이 들었을까.
네다섯 살 무렵부터 이미 아이는 바지보다 치마를, 파란색보다 핑크색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즐겨 보는 만화에서는 공주들이 티파티를 즐겼고, 쇼핑하러 가면 옷가게마다 화려한 원피스가 아이를 유혹했다. 이런가운데 치마는 활동하기 불편하니 바지를 사자고, 분홍색 옷만 입으면지루하니 다른 색도 골라 보자고 아이를 설득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치렁치렁한 치마에 큐빅이 잔뜩 박힌 구두를 신겠다는 아이와 아침마다 실랑이하며, 나는 이렇게 일찍부터 내 딸을 여성화 하는 세상이미웠다. 물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고 누구나 본인이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 아이가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끼게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이게 그리 간단한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대부분의 콘텐츠에서 여자 캐릭터는 치마를 입고 있고, 특히 비중 있는 여자 인물들은 하나같이 긴 머리에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이라면 아이가 드레스 외의 다른 아름다움에 대해 느껴볼 기회가 있겠는가.

인간의 아름다움은 다양하다. 당연히 여성도 그렇다.

반바지를 입고 농구 골대에 멋지게 골을 넣는 아름다움, 머리 질끈묶고 그림이나 만들기에 집중하는 아름다움, 동물이나 식물을 돌보느라 지저분해진 티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는 아름다움도 드레스를 입고- P29
티파티를 즐기는 아름다움 못지않게 예쁘다. 그런데 그 다양한 아름다움을 내 딸은 접하기가 힘들다. 성별에 편견 없는 진취적인 사람으로 딸을 키우기에, 세상이 녹록지가 않다. 공주물로 가득한 유아 콘텐츠의바다를 어렵게 뒤져 그나마 괜찮은 걸 찾아내고, 색깔에는 남자 여자가없다는 걸 반복해 얘기해주고, 옷을 고를 땐 예쁜지 안 예쁜지와 함께적절하고 편안한지를 고려해야 함을 아이의 언어로 설명하는 부모들의고군분투를 유치원이 조금만 이해해주었더라면, 다른 방식의 졸업 사진 이벤트를 기획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최근 몇 년째 화제가되고 있는 의정부고등학교의 졸업 사진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재치 있는 기획으로 해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 멋진 졸업 사진이, 유치원 버전으로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요즘 아이들에게 드레스가 단순히 잘 차려입은 옷, 정복, 예복의 의미가 아님을감지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굳이 공식 행사의 단체 복장으로 지정함으로 드레스의 위상을 더 높여주지는 않을 만큼, 유치원 선생님들이그 정도만큼만 예민해주실 수 없는 걸까.
내 아이가 성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현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정도는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건혀 소박한 바람이 아니며, 결박하게 추구해야만 겨우 근처에 닿을 수있는 어려운 과제라는 걸 검점 깨닫는다. 면담 시간에 선생님께 전하고싶은 건 그 절박한 마음이었다.- P30
《나의 페미니즘》시얼샤 로넌Saoirse Ronan

페미니즘은 나에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순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페미니즘이란 일생에 걸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며, 이런 사건 하나하나를 소소하지만 유익한 경험이 되도록 해준 나의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준 결과다. 가령, 스물한 살 때 활동가 베프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페미니즘의 뜻과 페미니스트가 된다는것의 의미를 널리 알릴 수 있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언제나 마음속에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페미니즘 》

<엄마>
보고 배우기.
질문.
포옹.
생리 이야기.
- P22
남자 친구/여자 친구 이야기.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아무 노래나 되는 대로 부르기.
밀어내기.
다시 돌아가고 또 되돌아가기.

<집>
집에 소속되기.
집을 떠나기.
집으로 돌아가는 나만의 길 찾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면서 내 가족 태우기.
도움도움받기.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도움에 보답하기.

<일>
일에 관심 갖기.
일을 위해 싸우기.
일을 위해 살기.
일 없이 살기.
일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모으기.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기.


- P23
<발견할 것들>
음악, 영화, 책,
영화 <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
사랑 사람들, 섹스,
나의 몸(아니 이게 대체 뭐람?! 이거 정상 맞아? 너도 그래? 아, 그렇다고?! 휴, 됐어, 다행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네‘)

<존재 방식>
혼자 있기.
무리 이루기.
형편없이 겁먹기.
자신감 갖기.
가능한 한 자신에게 솔직하기.

<여성>
그들을 사랑하기.
그들과 함께 일하기.
그들을 응원하기.
그들과 함께 축구하기.
그들과 함께 웃고 춤추기.
그들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기.

<남성>
그들을 사랑하기.
그들과 함께 일하기.
그들을 응원하기.
그들과 함께 축구하기.
그들과 함께 웃고 춤추기.
그들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기.- P24
<페미니스트 엄마와 함께한 인터뷰> 중에서
엄마 : 차별 행위가 불법이 되면 좋겠고,
이에 대한 법률이 마련되어서 차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단다.

그리고 임금 수준은 앞으로 동등해질 거라고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렇게 되어야 해. 나는 미래의 여성들이 존중받으면 좋겠고, 특별히 요구하지 않더라도 평등했으면 한단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구나.

조디 휘태커 : 스톱 버튼을 눌렀다.
장차 우리 딸도 나를 인터뷰할지 모른다. 그때도 대화 내용은 같을까? 젠장, 그렇지 않길 바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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