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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정님의 서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에게 맛있는 기사주려고 한 게 뭐가 문제냐고 ‘선의‘라며 이런 행동을 두둔하는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상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조심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묻고, 필요 없다고 거절하면 즉각 물러난다. 하지만 저 아저씨들은반말로 무례하게 접근했고 그조차 대답을 듣지 못했다며 금세 언짢음을 표시했다. 이것은 선의가 아니다. 자신이 성별과 나이 위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전제 아래 제멋대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생각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까 바로 언성을 높여 내 말을 무시한다고 항의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 P36
여성주의 심리상담가 미리암 그린스팬에 따르면, 독립적이고 자아존중감이 강한 여성일수록 친밀함속에서 자아가 사라질까 두려워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아내나 어머니, 딸과 같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독립적으로 생각할수록 기존 여성정체성과 갈등이 생기게 된다. 많은 여성은 직업적 성공을 위해 사적인 관계의 달콤함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경험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무서워하게 된다.
- P38
여성학자 정희진은 영화 〈무간도>의 의미를 재해석하며, 경계가 없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다. 수 년간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가 친구까지 전 남자친구의 폭행으로 상해를 입자 그를 고소한 스물일곱 살 A 씨는 "사랑이 이렇게 지옥 같은 건 줄 몰랐다"
며 눈물을 쏟아냈다. 나와 너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은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일이다. 법적 정의도 사회윤리도 모두 진공 상태인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낙원일 테지만, 상대에 따라 내삶의 질이 총체적으로 결정되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약속하고 있는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사람일수록 친밀한 관계 안에 배태되어 있는 부정의와 비윤리성에 마음 깊이 끌리는 것을 자주 봤고, 때로는 나 역시 그렇다. 이런상태에서는 헤어지는 일을 결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건 더욱 힘들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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