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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유님의 서재

고통의 필터이자 고통의 확성기가 된다는 선천적 모순에 휩싸여, 기자들은 매 순간 저울질을 한다. 어떤 고통을 보여줄지, 이보여주기가 윤리적인지, 혹은 어떤 고통을 가릴지, 이 가림이 윤리적인지에 대해. 실패하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지도모르는 이 저울질은 하릴없이 아슬아슬하다.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하는 기준에 부응하는 일은 언뜻 불가능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시도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의 저널리즘이안방에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볼거리로 전락해 남의 고통을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소비하는 유해한 저널리즘이 될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끔 하고 사회적 공감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윤리적 저널리즘이 될지가 이 개별의 저울질에 달려있어서다. 이 저울질이 끝내 성공할지는 한 고통이 발생하고 보도가 시작되는 순간마다 매번 정말이지 매번, 미지의 영역이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유포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일부 방송사가 이 현장 영상들을 뉴스에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단지 영상에 찍힌 모습의 참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 늘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보면 안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영상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는 피해자들의 초상권과 더불어 촬영자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줬다고 본다. 구조 인력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촬영자들이 구조 대신 촬영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보는 이들을 괴롭혔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사고현장에 서서 ‘구경하는 눈‘을 간접 체험했다. 각자의 상황이 다양했으리라 추측하지만, 죽음을 구경하는 카메라가 이미지를 보는 사람까지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방청 119 대응국장은 참사 열흘 뒤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자들의 사진을 촬영하는 등 현장 지휘와 질서유지에 방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목격과 구경을 구분하는 기준은 있을까. 구경꾼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부단히 내부 단속을 해온 언론의 경우는어떨까.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마련된 한국기자협회의 재난 보도준칙에 관련 규정이 나와 있다.



제4조(인명구조와 수습 우선 재난 현장 취재는 긴급한 인명 구조와 보호, 사후수습 등의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재난관리 당국이 설정한 폴리스라인, 포토라인 등 취재 제한은 특별한 사유가없는 한 준수한다.

제7조(비윤리적 취재 금지) 취재를 할 때는 신분을 밝혀야 한다. 신분 사칭이나비밀 촬영 및 녹음 등 비윤리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한 취재는 하지 않는다.

제15조(선정적 보도 지양) 피해자 가족의 오열 등 과도한 감정 표현, 부적절한 신체 노출, 재난 상황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흥미 위주의 보도 등은 하지않는다. 자극적인 장면의 단순 반복 보도는 지양한다. 불필요한 반발이나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지나친 근접 취재도 자제한다.

제18조(피해자 보호)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가족,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제19조(신상 공개 주의)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세한 신상 공개는 인격권이나 초상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준칙에 따르면 재난 현장에서 촬영은 인명 구조 등 긴급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허용된다. 또 피해자 가족의 오열 등감정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신체 노출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홍미 위주의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하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내보내는 것은 지양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당시 현장에서 찍힌 대부분의 영상들은 이 준칙을따라야 하는 언론인이 찍은 건 아니었지만, 이 모든 요소와 대척점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 이 공포는 카메라를 꺼내들어 남의 절박한 고통을 보고 듣고 기록하고 생중계하는 순간부터 시작돼 편집하고 재구성한 뒤 널리 퍼뜨린 이후까지 이어진다. 공포의 근원은 이걸 찍어서 보여준 뒤에도 내가, 이걸 본 뒤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못할 수도있다는 데 있다.
저널리즘에서 직접적 행동의 책무는 어쩌면 매우 의도적으로도려내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특성상,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절한 거리를 둔 채 감정을 섞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실무는 고통을 보여주고 전달하는 데서 대체로 멈추곤 한다.
기자이자 작가인 조앤 디디온Joan Diction은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비단 글뿐인가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매체를 활용하든 이 혐의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촬영이나 글쓰기 등으로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일, 혹은 전달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건 지나치게단순한 비판일 것이다. 불완전한 시도라고 해서 근본부터 잘못되었다고 일갈하고 마는 것은 해결책 없는 공허한 진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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