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동성결혼이 법제화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전에 언니가 병에 걸렸는데 내가 법적 보호자가아니라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이런 커다란 파도 앞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 하고 손놓고 있기엔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일례로, 중학생 때 보던 한 만화에 심취하여 내가 외계 행성에서 온 우주인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웃어넘기는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당시 언어 담당 선생님은 그이야기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대체 언제부터 레즈비언이었던 걸까? 처음으로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칭하기 시작했을 때?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그 질문을 한 주체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성애자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 하긴, 나한테 굳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을 보면 그러함이 분명하다. 설마 본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레즈비언은 소수자니까 특수한 계기가 있을 거라고 무례하게 지레짐작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자신의 정체성 확립 시점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자인 나는, 계속 성찰을 반복할 수밖에.
팁 첫째, 커밍아웃은 자기소개다. 회사 면접에 빗대긴 했지만,
커밍아웃은 누구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나를 받아달라는 구애의 행위가 아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보 전달에 가깝다.
흔히 보수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은 동성애를 잘 수용하지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보수성을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다. 보수적인 가치 중 물론 남녀간의 사랑과 정상 가족의 유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우정, 의리, 그리고 집단주의적 사고 등도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에게 호의적인 환경을 미리 조성해놓았다면 보수적인 사람들도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몇 년 전 영국에 출장을 갔을 때, 히스로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한 광고가 눈에 띄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한 은행의 포스터였다. 노인이 정원에서 손자와 산책하는 장면, 한 아이가 귀여운 고양이와 노는 장면 등 일상적 풍경이 나열된 뒤 마지막으로 레즈비언커플의 결혼식 장면 위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야망에 대한 이야기다(This is the story of humanambition)."
상투적인 감성의 제작물이었다. 일상적인 행복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환기하며 생활 밀착적인 이미지를 가져가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이 글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연락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결혼은 나에게야망이라고
"부장님, 제가 이런 분께 무슨 추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문제라면, 언니에 비해 내가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인 점이었다. 소득도 적어, 학벌도 부족해, 외모가 대단히 훌륭하지도 않아, 심지어 인성도 더 못된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부족한 건부족한 거였다. 내 얘기를 찬찬히 듣던 부장님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무슨 소리예요, 규진, 많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죠. 언니 말 잘듣기, 귀여움을 갈고닦기, 긍정적으로 말하기, 약속에 늦지 않기?"
존경하는 현명한 부장님의 고견을 해석해보자면 즉 괜히 열등감을 표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내 매력과 올바른 태도로 승부하라는 얘기 같았다. 하긴, 언니가 소득이 높은 사람을 만나고싶었다면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겠지. 나의 높은 자존감과 거부할 수 없는 귀여움에 빠졌나보다. 그래, 연하는 직진이지!
"언니, 두 번 봐서 좋으니까 세 번 봐도 또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나랑 만나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봐도 내가 제일 괜찮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