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 잘 안 돼서 답답하지. 그래도 결국은 우리의 회복력을 믿어야 해. 인간이 매 순간 배우고적응하는 존재라는 걸,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걸 믿어야 해. 지금 네가 스스로 느끼는 네 존재가 얼마나 연약해 보일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안너는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밤이 되면 나는 다리를 떼어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그림자 다리가 다시 그 자리를 찾아왔다. 마치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한 감각.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다시 환지통이 느껴졌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통증도 없었다. 눈을 감고 몸을 정적 속에 놓아두면 나는 안전하고 안락했다.
사람들은 나를 무대로 다시 불러줬다. 그들은 내가 절망을 이겨내고 다시 춤추는 모습을 보고싶어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었던 내가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정상에서 추락한 무용수가, 고통을 딛고 또 한 번 정상으로 오르는 이야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나를 앉혀놓고 끔찍한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무대로 보내 그 모든 것을잊게 만드는 눈부신 도약을 펼치라고 했다. 나는그것을 제법 잘 수행해냈다. 수술과 재활로 진 빚을 모두 갚았고 3년에 한 번씩 의족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나는 나의 고통을 팔아서 생존했고, 때로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모멸감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도약해야 했다.
나는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은 강인해요. 당신의움직임이 나에게 영감을 줘요. 어느 순간부터는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더는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질문도 그만두었다.
"유안 씨, 그거 알아요? 그곳의 귀환자들은 아예 치료도 거부하고, 움직임도 포기하고 침상에만누워 살아간대요. 구호단체들이 그렇게 지원을 많이 보냈는데도,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다고요. 그에 비하면, 유안 씨는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해요.
도와주겠다는 손길이 그렇게 많은데, 다 포기하고 게으르게 누워만 있다니. 정말 너무 한심하지 뭐예요. 그런데 유안 씨,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아무리 돕겠다고 해도 일어나질않아요. 자기 몸을 책임지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인데도, 나몰라라 하고 스스로를 포기한 거지. 어쩜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 난 이해가 안 돼.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므레모사에서는 삶의 권력을 고정된 것들이 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끝내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의사의 회고를 읽고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바라왔는지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유안, 난 아무리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모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도우러 온 사람들이었는데, 선의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이용하다니. 그들을 비참한노예로 만들다니. 어떻게 그것이……."
"그래서 도울 수 있게 했잖아요. 선의를 베풀 수있게 했어요."
"모두가 므레모사에 그러려고 왔죠. 도움을 베풀러 왔고, 구경하러 왔고, 비극을 목격하러 왔고, 또 회복을 목격하러 왔어요. 그래서 실컷 그렇게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행복한 결말 아닌가요?"
작품해설
재난이 벌어진 자리에서, 방문자들은 그 재난의 흔적을 목격하고 고통을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재난은 이목을 집중시킨다. 재난에서 생겨난 고통만으로도, 이 고난을 겪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만으로, 재난은 충분히 ‘스펙터클spectacle‘을 선사하는 볼만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수전 손택은 SF가 영화와 만났을 때 "예술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인 재난"을 재현하며, 구경거리 위주의 형식을 취하면서 고난과 재난에서 미적인 쾌감을 즐기게 한다고설명한다. 이러한 쾌감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 ‘숭고sublime‘,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이 위협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낸 불쾌에서 쾌로 전이하는 감정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말
시간이 흐르면 어떤 죽음은 투어의 대상이 된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이면서 침범하고 훼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쓰며 그 사실을생각했다.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쓰면서 ‘아,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좋아했었지‘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