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 것일까? 스캇이 던진 약간은 생뚱한 이 질문은 몇 가지 신학 주제를 담고 있다. 간디는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을 했다. 불신자가 하는 선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답변이 준비되어 있다. 신약학자인 스캇은 이 답변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불신자가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게 아니라 간디의 선한 일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선뜻 답변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간디의 선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불신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고(5장)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는 존재하지 않고(6장)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고(7장) 거칠게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방점을 찍는데 스캇은 이것을 뒤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당장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런 스캇의 생각은, 그가 4장에서 잘 정리하고 거부한 예수님 당시 하나님 나라를 표방했던 5가지의 유형 중, 거룩한 후퇴전략을 쓴 에세네파의 견해 같아 보여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스캇은 7장에서 하나님 나라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사명을 아홉 가지로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사회정의를 다룬다(216). ‘복음적’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스캇은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을 수용한다.(217). 하지만 이런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일로 편입시키지 않고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치부한다.
사실 난 이 차이를 잘 모르겠다. 신자든 불신자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명명하든,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선한 행동으로 묘사하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밖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드렸을 때 교회가 세속화 될 수 있다는 스캇의 염려에 공감한다. 이 땅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나그네라고 하는 성도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스캇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런 것이 자칫 세상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말에도(222)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렇게 말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난 자칫 이런 스캇의 염려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성도와 교회가 움츠려 들까봐 더 염려스럽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다’는 스캇의 말을 접하고는 스캇이 채워넣은 중요한 가르침은 다 들어내고 제목만 사용할 공산이 크다.
혹 진보적인 ‘스키니스 스타일의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며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스캇의 말대로 틀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보다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을 통해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장을 담그는 것에 비유한다면 신학적 오류는 구더기에 불과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는 것을 포기할 순 없다.
스캇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현재가 불완전함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하지만 정작 신학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 같다. 설령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신학적 언명이 미숙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격려하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신학적 미숙을 온전케 하려는 신학자의 사명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도들을 교회 안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이 책의 분위기다.
또한 아쉽게도 세상에 대해 가진 스캇의 생각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는 심지어 ‘예수는 세상을 보다 나은 장소로 만들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시키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46) 신약성서에서 세상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다(367)’고 주장한다. 이는 바르트와 재세례파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사실 스캇은 이 책에서 바르트와 재세례파를 비중있게 다룬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요3:16)’ 그리고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뿐만 아니라 홍수 후 노아에게도,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문화명령에 대해서도 균형있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캇의 일차독자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성도들이다.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스캇의 말은 충분히 이해된다. 미국은 한때 하나님이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곳이다. 미국을 이룬 청교도들 역시 국가교회 즉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스캇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부록에서 더 상세하게 기술하지만 루터와 칼빈 뿐만 아니라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도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하는 틀로 봐야 한다는 스캇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이 책의 유용한 점 중의 하나다
한국교회도 정교분리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정파를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이다. 복음화 성시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캇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에만 오면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세상을 안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교회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캇이 말한대로 정의와 평화가 먼저 교회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교호의 일차적인 사명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게 하나님 나라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