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는 화란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수상까지도 역임한 정치가다. 신학자이자 정치가. 이런 그의 특이한 이력은 그의 신앙을 가늠케 한다. 그는 교회 안에만 있는 성도들을 공공의 장소로 불러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구나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복음주의로 전향한 인물이다. 사회변혁이 자유주의 신학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카이퍼는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 신학에 대한 개괄서인 이 책은 한국교회에 매우 적절하고 절실한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카이퍼의 신학과 문화관을 개관하며 소개한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정점은 ‘영역주권’이다. 그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가 존재하는 삶의 영역들 중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21)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거듭 강조했다. 이런 그의 믿음은 영역주권을 통해 구체화된다. 영역주권이란 하나님이 여러 영역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영역에 주권을 부여하셨기에 다른 영역이 그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영역주권 사상으로 그는 교회가 모든 영역을 독점하려 했던 카톨릭과 하나님의 통치를 교회에 국한 시키려 했던 계몽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2부는 ‘21세기를 위한 카이퍼’인데 마우어는 카이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카이퍼의 통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이처럼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좋다. 카이퍼 역시 칼빈을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카이퍼를 신(新)칼빈주의자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사람은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이런 것을 알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우어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카이퍼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슬람의 도전’에서 그는 이슬람과도 적극적인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슬람의 확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 지점에서 머뭇거릴 것 같다. 하지만 카이퍼가 왜 타종교 특히 이슬람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는지에 대한 마우어의 설명을 읽어보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의 영역주권은 다형성을 존중하는 카이퍼의 생각 속에서 자랐고 일반은총을 통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마우는 ‘아브라함 카이퍼상’을 받을 만큼 카이퍼 전문가다. 또한 그는 <버거킹에서 기도하기>(IVP) <칼빈주의, 라스베가스 공항을 가다>(SFC)에서 볼 수 있듯이 쉽고 간결하게 성경과 신학을 소개하는 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역시 마찬가지다. 카이퍼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편하게 쓴 책이기에 쉽게 읽힌다. 카이퍼의 방대한 신학을 모두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간략하게’ 서술했기에 질리지 않는다. 카이퍼 입문서로 매우 적합한 책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