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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님의 서재
  • 칭의 논쟁
  • 마이클 호튼 외
  • 19,800원 (10%1,100)
  • 2015-02-25
  • : 742

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칭의 논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루터)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관점, 정교회(신성화), 로마 가톨릭 이렇게 다섯이다. 이들 다섯 신학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한 첫 번째 칭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한 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관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와 이 개혁파와 입장을 달리하는 넷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난 전통적 개혁파의 속한 장로교 목사로서 마이클 호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려진 무죄 판결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호튼의 말대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성화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는 여기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전 9:27).

 

바울의 새관점이나 진보적 개혁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신성화는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들은 결국 선행이 구원과 결부되며 칭의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의를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성령과 함께 한 우리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중요한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희미해지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학의 한계는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책에 소개된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짜피 중요한 교의학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이것이 개신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던 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교파의 다양성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 대화하지 않고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런 논쟁을 통해 결국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가진 견해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한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가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 견해들을 읽으면서 특히 바울신학의 새관점과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다섯 관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다. 개혁파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를 통해 이루어가든 나머지 네 관점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라고 하든 결국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칭의론에 대한 이런 균열은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두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연구한 열매들이지 않는가! 인간과 신학의 한계 때문에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의 논쟁을 통해서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서 신학은 서로 배우며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런 대화와 논쟁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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