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추다. 십자가 없이 기독교 신앙을 논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돌아가셨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가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대신 죽었기에 내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형벌 보상론'으로 알려진 이 교리를 교회는 지금도 가르치며 찬송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 역시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형벌 보상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이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더 나아가 형벌 보상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에 있는 메노나이트성서대학의 교수인 마크 베이커(Mark D. Baker)와 애즈베리신학교의 신약해석학 교수인 조엘 그린(Joel B. Green)은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죠이선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며 '형벌 보상론'을 비판한다. 이들은 던(James D. G. Dunn)과 골딩게이(Goldingay)를 인용하며 구약성경의 제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물이 되는 동물이 제사 행위의 객체를 대리할 수 있지만 제사 행위 자체가 보상이나 형벌이라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88쪽).
이들이 괜히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이 속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들이 살펴본 바로는(2~4장)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아예 속죄 신학이 없다. 예수님은 제사 없이 죄를 용서해 주신 적이 있다. 구약에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잔인하게 죽으셨다는 사실 즉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그 사실의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관점에서 강조했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의 속죄론을 제시한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회사를 통해 소개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즉 속죄의 네 가지 중요한 견해를 소개한다. 승리자 그리스도, 보상설, 도덕 감화설, 형벌 대속(보상)론이다(178쪽).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각각의 견해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속죄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그 의견들이 시대에 따라 달랐다는 점이다. 당연히 우리가 지금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벌 보상론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온 교리가 아니라 중세 때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형벌 보상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형벌 보상론이 속죄론의 유일한 교리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비판하는 까닭은 이 교리가 가진 위험 때문이다. '형벌 보상론은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형태의 믿음을 낳는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형벌 보상론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만 감사하고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게 한다. 또한 용서받는 죄는 언급하지만 정작 싸워 이겨야 할 죄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결국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만 있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나는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개인적이며 이기적이다. '값싼 구원'의 원인이 '형벌 보상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분석은 옳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판단을 하는 분들이 계신다. 얼마 전 4월 2일에 한국개혁신학회 108차 정기 학술 발표회에서 연세대학 조현철 교수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대속적 이해가 가지는 신 인식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조 교수는 이 논문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속죄적 의미를 제거하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크와 그린처럼 조 교수도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가 값싼 구원을 가져왔다고 본 것이다. 김세윤 교수 역시 이미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새물결플러스, 2013)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최근 세월호 사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구원파의 구원론과 흡사하다며 비판한 바 있다. 윤리적 삶이 부재한 구원파의 신학적 오류 역시 속죄론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는 다면 이보다 더 큰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형벌 보상론은 경계해야 하고 십자가의 또 다른 풍성한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 보상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은 형벌 보상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긍정하는 것은 형벌 보상론의 내용이 아니라 형벌 보상론의 존재다. 이들은 형벌 보상론이 나름대로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형벌 보상론은 적실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저주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이들은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는 분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노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다. 그리고 우리를 취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신비다.
교회가 형벌 보상론을 신조로 받지 않았다는 이들의 주장은 옳다. 사도신경을 신조로 받은 이후로 기독교회 전체가 받아들인 신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파의 신학에 지배를 받지 않는 신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 보상론이 마치 한 개인의 의견인 것처럼 호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형벌 보상론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교회(교파)가 고백하고 전수한 교회(교파)의 신앙고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일치 신조는 공히 형벌 보상론을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형벌 보상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윤리적 측면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형벌 대속(보상)론을 주창하는 사람으로 소개한 존 스토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IVP, 1989)에서 십자가를 형벌 보상론의 입장에서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가지는 폭넓은 의미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십자가가 개인의 사죄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희생하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형벌 보상론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성경을 따라 바르게 전하며 가르치지 못한 교회와 사역자가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기에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삶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역인 영역으로 축소된 복음을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할 때이지 않는가! 그리고 시대의 언어로 진리를 선포해야 할 신학적 사명을 강조한 것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벌을 내림으로 구원하는 하나님을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말한 대로 신학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아닌가. 이런 사명에 충실한 더 많은 신학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