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_ 김지혜 지음 (창비)
특권이 내면화된 나에게
요즘도 공중파 방송을 보면 출연자들이 ‘바보’, ‘병신’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쓰는 모습을 본다. ‘바보’는 주로 ‘동네 바보’라는 말로 자주 쓰이고 ‘병신’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때 자주 쓰인다. 둘 다 장애인을 가리키며 비하하는 말인데 언젠가 한 번 지적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출연자들의 부적절한 발언을 ‘삐~’ 소리로 처리하면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요소로 활용하는 듯하다. 시청자들은 그 내용을 유추하면서 발견의 재미를 찾는 것도 같다. 그 내용 가운데는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많이 담겼다. 그러한 표현을 마주하면서 분명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만, 프로그램의 재미에 휩쓸려 금방 잊어버리곤 하는 나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그럴 때면 불편한 상황을 잠시 견디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이제는 뿌리 깊게 박힌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나도 위에서 언급한 그런 말들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난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작가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라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주었지만 뭔가 크게 잘못 생각했고 지내왔다는 직감을 하고 나서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장애인 봉사활동을 꽤 오랫동안 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조금은 놀랐던 건 그들이 자조 섞인 말투로 농담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을 종종 쓸 때였다. ‘애자’, ‘장애자’라는 말을 줄여서 자기들끼리 재미 삼아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장애인인 당사자들이 그렇게 표현하면서 웃기에 나 역시 그래도 되는가보다 싶어서 별생각 없이 웃고 넘겼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장애인과 봉사자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건 재미있는 표현이 아니라 불편한 표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불편함을 표시했던 이들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신나게 웃던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장애인과 가까이 지낼 일이 없어진 나를 발견한다.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거의 매 순간 불편함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신마비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날은 불편함을 공기처럼 마주해야 했다. 침대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앉히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옷을 입히고 콜택시를 불러 태우고 목적지에 가서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보람된 마음과 함께 후련한 마음이 동시에 어쩌면 더 많이 몰려온다. 그 후련했던 마음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장애인에게는 불편함이었지만 나에게는 특권으로 가득한 일상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중증 장애인 봉사활동은 덜 했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났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활동에 큰 불편함이 없는 약시(弱視)를 가진 장애인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마음이 어렵지 않았다. 위험한 곳을 지날 때 잠시 팔만 잡아주면 될 정도로 그를 돕는 일은 아주 쉬웠다. 이제야 조금 깨닫는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일상에서의 특권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장애인과 있을 때 내 모습이 평소와 가장 비슷한가를 큰 그림을 그리며 봉사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빠져나오듯이 장애인들에게서 벗어났던 나는 비장애인이다. 그들과 조금 멀어지고 나서 그들에 관한 내 생각은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굳어져 있을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책에 등장하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과연 나의 반응이었다. 왜 저런 방식으로 표현할까, 다른 방법으로 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생각이 바로 내가 품었던 생각이다. 나는 그저 비장애인으로서 당연히 어떤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권리가 특권인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침해받았다는 생각만 한 것이다.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향한 나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꽤 합리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장애인으로서 특권을 방패 삼아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p.184)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너의 생각을 존중해’, 라는 말은 이제 흔히 쓰는 말이 되었다. 우리는 이 말을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매너 있는 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젠틀한 말도 언제부턴가는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말로 사용되는 것 같다. ‘너와 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끝내자’, 라는 의미로 말이다. 이처럼 이 말의 쓰임이 어느 순간 날카롭게 다가와서 뭔가 개운치 못한 구석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가 어쩌면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다르다’라는 말을 기형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기존의 질서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다르다’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향해 점잖게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낙인과 억압을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자신을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장애인을 멀뚱멀뚱 바라본 게 아니었을까. 이 특권이 몸에 밴 역사는 내 유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아득한 그 거리만큼이나 장애인을 향한 내 마음도 어느새 아득해진 것을 발견한다. 다시 장애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라고 걱정하게 되는 건 그들은 돕는다고 하면서 그저 연민의 마음만 품고 여전히 ‘선량한 차별주의자’ 행세를 할까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나는 내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내가 있어야 할 곳, 그리고 장애인이 있어야 할 곳을 하나씩 알려줄 것 같아 조금은 용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