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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ia님의 서재
  •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조국
  • 19,800원 (10%1,100)
  • 2022-11-09
  • : 13,974

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안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들 가운데 산책을 즐겨 했던 이들이 여럿 있다. 소크라테스는 산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하이데거는 숲속을 산책하며 존재를 사유했고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산책은 단순히 기분 전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동안 품었던 생각을 전개, 확장하고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가볍게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 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을 아마 많은 이가 경험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휴식의 시간이자 깨달음의 시간이며 치유의 시간이다.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의 제목을 보며 가장 눈에 띈 단어가 ‘산책’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법고전이라는 단어와 가볍게만 느껴지는 산책이라는 단어의 부조화 때문이다. 더구나 산책이라는 말은 책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개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고자 하는 책에 사용된다. 그런 책을 읽으며 당황스러울 만큼 가벼운 걸음만 실컷 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 가볍게 다닌다는 산책이라는 의미를 단어 그대로 실현한 책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국 교수의 책은 산책이라는 이름처럼 가벼움도 있지만, 그 가벼움에만 머물지 않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15권의 법고전을 소개하며 핵심이 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을 뿐만 아니라 이 고전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책은 조국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기에 접근하기에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그야말로 부담 없이 산책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가볍게 산책하듯 읽어나간 책은 서서히 법고전의 핵심에 이르도록 했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토록 많은 기본서가 나왔지만 계속해서 기본서가 나오는 이유는 그 기본만 제대로 알아도 핵심을 알게 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때문이다. 조국 교수의 이 책은 우리가 이미 알게 모르게 품어왔던 법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또한 법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소개하기 위해 산책이라는 장으로 이끈다. 철학자들이 했던 산책의 의미를 조국 교수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 중에서 법과 관련한 주제를 다뤘다. 대개 법이라고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게 일반적이다. 법은 실제로는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법의 내용은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법이 지향하는 바도 추상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자유, 평등 이러한 가치는 물론 좋게 느껴지지만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법을 전문가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법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한 사람(한 사람만이 아닌)의 소중함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나마 법이 조금 더 친근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법에 관한 이야기가 친근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과 같은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한 사람의 소중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한 사람의 가치를 담은 말이 ‘인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에서 자주 쓰는 말이라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지칭한다. 영어의 ‘people’이 바로 ‘인민’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흔히 쓰는 ‘국민’이라는 말은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한데 영어로는 ‘nation’이라 쓴다. ‘국민’은 특정 국가를 전제하지만 ‘인민’은 국가 이전에 존재한다. 저자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은 국가가 있기 전이라고 말한다. 국가 이전에 존재한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를 하여 나라를 만들자”라고 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이는 로크가 말한 ‘자연법’이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안티고네가 강조한 ‘신의 법’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국가도 없고 법도 없었지만, 자유와 평등을 꿈꿀 수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법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느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계약을 통해 국가와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게 살아온 세월은 거의 인간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부여받은 권력을 모든 사람을 자유와 평들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사물의 추이가 항상 평등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입법의 힘은 항상 그것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p.41)

 

여기서 ‘사물의 추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 말하는 것이 아닐까. 루소의 문맥에서 보자면 ‘권력의 속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권력은 누구의 손에 쥐어지더라도 그것을 선용하기보다는 남용하기 쉬워진다는 말일 게다. 그렇기에 권력은 견제되고 또 견제되어야 하고 권력을 부여받은 자는 끊임없는 자기 객관화를 거쳐야 한다. 루소가 입법의 힘으로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권력을 분산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도 연결되었다. 루소는 인간이 권력을 다루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삼권분립을 최초로 제기한 몽테스키외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75~76)

 

몽테스키외가 말한 ‘사물의 본질’은 루소가 말한 ‘사물의 추이’와 맞닿은 말이다. 어찌 보면 ‘본질’이라는 말은 ‘추이’라는 말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느껴져 누구도 예외가 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우며 제도적으로 다른 권력을 견제 장치로 둘 때 그나마 남용하는 일이 줄어든다고 하겠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국가와 법률을 떠나 인간은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조심스럽게 거머쥐어도 통제가 될까 말까 한 권력을 너무나 자신감 있게 움켜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그렇기에 어느새 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빠져버리고 전체라는 덩어리로서의 사람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게 아닐까 싶다.

법이 인간을 담고 있고 인간을 향해 있는 한, 법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법은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대전제 안에서 법은 자기 내면을 파고든다. 그럴 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존재다.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법이라는 ‘사물의 추이’와 ‘사물의 본질’은 한 사람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토머스 페인이 말한 것처럼 “법이 왕”이 될 수 있다.

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면서 투박했던 법이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왕이라는 한 사람이나 소수 권력층만 자유로웠던 법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법으로 발전했다. 이는 어쩌면 법이 제 모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소중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법은 인간의 가치에 부합하고 인간의 분수에 맞는 법으로 다듬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부각된 소수자의 문제를 통해 ‘다수의 전제’라는 토머스 페인의 문제의식을 살핀다. 상대적 다수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법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해결된 문제는 그 아래에 묻혀 있던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법의 운동은 그 아래로 계속 향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상대적 다수가 된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끝으로 멈춰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집단은 ‘부분적 진실’, ‘제한적 진실’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권력과 마찬가지로 진실 역시 인간이 온전히 품을 수 없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계를 인정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형식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법은 자신을 끊임없이 객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만의 이득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행동하겠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법의 정신에 반영된 인간의 태도가 아닐까.

법고전을 대하며 법의 여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은 법을 만들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법으로 판단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법이라는 이름 위에 덧입혀진 권위의 덮개를 치워버릴 때 법의 억압에서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성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다. ‘영구 평화론’을 구상한 칸트를 이상주의적이라 염려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의 정신은 이상을 향해 있다. 책에는 ‘신의 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주로 법을 엉뚱하게 사용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로 사용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신이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에 자유와 평등을 알게 한 존재, 그 존재가 있다면 그를 신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그 신은 법이라는 이름 안에서 놀랍게도 우리 모두를 향해 다가온다. 아직 다가오지 못했다고 느끼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도 비록 더딜지라도 신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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