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도서관에서 인공적으로 채소를 키우는 조그마한 장치를 보았다. 태양광에 가까운 조명을 설치해 두고 상추와 같은 식용 채소를 키우고 있었다. 인류는 가까운 미래에 식량부족 현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가 진단한다. 이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에 맞서 인류도 살아남을 방법을 준비하리라는 것 역시 쉽게 예견할 수 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공적으로 채소를 기르는 것이다. 식량부족 현상을 직접 체감할 정도가 되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장식으로 채소를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러한 예측에는 뭔가 서글픈 구석이 있다. 식물을 자연과 교감하게 하지 않고 굳이 인공적인 방식으로 재배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것이다. 인류에 닥친 생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제시되는 대안이 자연스러움과는 다소 동떨어진다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도서관에서 만난 인공 장치를 보고 마냥 신기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다가올 미래의 여러 단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동고가 쓴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은 그러한 고민을 근본에서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다가올 미래를 우리에게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지금 여기에서의 마음가짐과 실천에 관해 역설한다. 이 책은 자연, 그중에서도 식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도록 한다. 요즘처럼 ‘인문학’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때도 없지만 ‘반성’과 ‘성찰’이라는, 인문학 본질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식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식물을 가볍게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적과 비판이기에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일까, 분명 따끔한 충고가 담긴 글이지만 부정적인 느낌이 들기보다는 더 나은 삶으로 초청하고 싶은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저자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대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 그중에서도 식물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는 우리의 태도를 꼬집는다. 가끔 식물을 가까이 두려 할 때도 있는데 그건 바로 장식으로 이용하려 할 때이다. 저자는 이를 자연의 ‘대상화’, ‘기능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식물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더라도 ‘꽃’에는 잠시나마 눈길을 준다. 여전히 동네 곳곳에 꽃집이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사람들이 꽃에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구나, 하고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이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저자는 “식물 일생에 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새순, 봉오리를 거쳐 꽃이 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꽃이 시들고 열매가 익고 잎이 마르는 모습마저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인문적인 시각이고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식물의 생애 전체를 지켜보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더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지켜보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주로 시간 낭비처럼 여겨진다. 식물을 바라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일상이 너무 분주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본다는 건 소위 ‘실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식물을 마주한다 해도 사람들의 태도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무르기 쉽다. 그저 식물의 이름을 아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안타까워하는데 이는 물론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의도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식물의 많은 부분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개념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관계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기보다는 정복하고 훼손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연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를 아주 작은 사건에서도 발견하는 듯하다. 책에는 꽃 화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며칠 간격으로 물을 주면 좋은지, 잘 안 죽는지 등 식물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저자에게 묻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럴 때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주 보세요. 자주 보시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p.24)
식물을 기계적으로 키우지 않았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긴 말이다. 이는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이나 식물에 무엇이 필요한지 매뉴얼 대로 적용하여 깨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앎이다. 식물의 특정 부분에 관한 관심이 아닌 식물 존재 자체에 관한 관심이다. 그러한 관심에서 비롯된 앎이 진정한 앎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를 ‘생명의 지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종종 아이들이 흙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본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흙 놀이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흙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며 자연을 배우고 자연과 교감하는 일은 단편적인 앎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다. 돌아보면 지금의 어른에게도 유년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어느 시기부터 흙 놀이를 중단했고 그 이후로는 오직 머리로만 이해하는 공부를 했다. “자주 보세요.”라는 말에는 온전한 앎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현재형으로 쓰인 이 말에서 잃어버린 생명의 지식을 다시 찾을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기후 변화에 따라 ‘자연의 역습’이라는 자연재해가 매년 더 심해지고 있다. 우리가 이 역습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자연을 가꾸어야 한다면 그것 역시 서글픈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좋은 일은 억지로라도 실천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식물을 사랑하는 저자는 ‘순환의 질서’를 체험할 수 있는 원예 활동이 생명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시들고 결국 사라졌다가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우는 일련의 순환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이 순환의 질서와는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마치 무한의 질서처럼 끝없는 재미를 약속하는 것들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듯하지만 실은 감당하기조차 어려워 여력의 한계와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정원에 관한 글에서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페르시아말로 ‘둘러싸인 것’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나 역시 내 주위를 나름의 파라다이스로 꾸미고 싶다. 그 파라다이스를 ‘자주 보면 알게 되는 식물’과 같은 자연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순환 가운데 나도 있음을 느끼면서. 이것이 내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