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운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으리라. ‘따다다단!’ 연속되는 네 음이 만들어내는 인상은 워낙 강렬해 한 번만 들어도 기억에 남을 정도이다. 베토벤은 이 곡에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그의 작품에 깊은 공감을 보낸다. 실제 우리도 ‘운명’이라는 말을 베토벤의 ‘운명’처럼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곡이 풍기는 인상처럼 뭔가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든지 압도하는 힘에 휩싸인다든지 하는, 받아들이기 벅찬 어떤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을 때 그것을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운명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감당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처럼 느껴진다.
뇌과학자 김대식이 쓴 『메타버스 사피엔스』를 읽고 생각난 단어가 바로 ‘운명’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메타버스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가까운 미래에 메타버스가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한다. 인류는 이제 막 메타버스라는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아직 크게 체감할 정도가 아니라 그 위력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메타버스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메타버스를 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마저 부족한 일반 대중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이 상황을 베토벤의 ‘운명’처럼 여기지 않을까. 입버릇처럼 말하던 ‘기술문명의 발전’이 끊임없이 이어져 이제는 메타버스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는데 그 세계는 아직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 미지의 세계는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또 다른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이러한 공포는 베토벤이 음악으로 들려준 ‘운명’과 비슷한 결을 지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는 과연 인간에게 버겁기만 한 것일까. 책 『메타버스 사피엔스』는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오해라는 말도 떠올리게 했다. 메타버스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말이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그 충격 때문에 의미 있는 생각을 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일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메타버스의 엄습을 예고하는 요즘 분위기처럼 『메타버스 사피엔스』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로 꽤 충격이었다. 거창하기도 하고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이르게 될 존재의 운명이 ‘메타버스 사피엔스’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습도 어딘가 불편하다. ‘또 하나의 현실, 두 개의 삶, 디지털 대항해시대의 인류’라는 부제는 일반적인 과학 서적 제목에서 흔히 보았던 문구 같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개운치 못한 책 제목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나 충격이 컸던 만큼 여러 번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생각의 흐름은 급기야 우리는 늘 변화 가운데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 변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 지혜롭게 적응도 했다. 변화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과 많은 부분 연결되었기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메타버스는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이다. 어떤 종류이든 변화는 고통과 번거로움을 수반한다. 변화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버겁다고 섣불리 여기는 이유는 그 변화가 지금의 현실과 많이 동떨어졌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큰 변화라 하더라도 그 변화를 이끌어낸 힌트는 우리가 살아왔던 현재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책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살피면서 호모 사피엔스가 메타버스 사피엔스로 넘어갈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책은 ‘현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 등은 메타버스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대개 가짜 현실로 여겨지곤 한다. 이를테면 시각 장치를 착용하고 실제처럼 그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는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진짜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각 장치를 벗고 마주한 현실은 진짜 현실인가. 저자는 책에서 현실을 근원적으로 고찰하는데 먼저 담대한 주장을 던져놓고 시작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인풋input이 아니라, 우리 뇌의 해석을 거친 결과물, 즉 아웃풋output입니다.” (p.28)
현실 그대로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뇌가 해석한 결과물을 현실로 경험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동물, 시각에 장애가 있는 환자, 음주 후, 꿈 등 사례를 들며 각각의 상황에서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고 말한다. 저자는 뇌의 작용에 관해 더 자세히 말한다.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인 정보를 왜곡해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뇌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망막 안의 혈관과 맹점이라는 정보를 지워서 보여준다든지 집중하는 정보 이외의 주변 정보를 지워버린다는지 체크무늬 패턴의 원을 여러 개 겹쳐놓은 그림을 보고 움직인다고 판단한다든지, 뇌는 철저히 자기 논리를 지니는 독립적인 존재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인간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뇌뿐만 아니라 심리도 현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내 것 혹은 내 편이라는 의식을 쉽게 떠올린다고 한다. 판단이라는 것 자체가 나 혹은 나와 가까운 존재에게 기울어진 채로 이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나와 내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이는 관대함이 좋은 예다. 인간에게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 게 있다면’이라는 가능성 정도로 축소된다.
저자의 말 대로라면 뇌와 심리 그 외 여러 요소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러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그 사물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 사물이 각자의 시각 프레임과 심리에 따른 각기 다른 연관 관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두고 모두가 같은 사물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게 각기 다르다면 우리는 함께 있지만, 그저 섬처럼 떨어져 각자 알아서 생각하며 사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을까. 저자는 메타버스에서 희미하게나마 작은 가능성을 본다. 메타버스는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현실이라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어차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메타버스에 몸을 맡겨 보자는 것이 아니다.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일례로 메타버스에서 만들 수 있는 나의 다양한 캐릭터는 혼란을 더하는 자아 분열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게 하는 자아 확장이 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실이라는 곳에서는 시도하지 못했던 나의 가능성을 메타버스에서 더 많이 실험해 볼 수 있다. 나를 현실과 마주하게 하는 면적을 넓힘으로써 내가 서 있는 현실을 조금 더 현실과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존재했다. 이에 관한 답을 찾는 여정을 함께할 매체는 이제 메타버스일 가능성이 커졌다. 인간은 그 오래된 질문을 늘 품고 있었기에 메타버스라는 낯선 환경에서도 자기 존재에 관한 낯익은 질문을 계속 던질 것이다. 그렇게 메타버스라는 운명이 일상처럼 우리 삶에 서서히 스며들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메타버스라는 세계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이내 적응하여 그 속에서 나를 탐구하고 함께 지내는 이웃을 살피며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럴 때 우리는 ‘메타버스 사피엔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 역시 해가 뜨고 짐을 맞이하듯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이 책을 통해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