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우리에게 준 기회
“진정한 음악은 음표들 사이에 있다.” 모차르트가 한 말이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격언이나 잠언은 대개 책의 큰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는 모차르트의 말에서 책의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진정한 음악은 음표들 사이에 있다, 라는 말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음악을 감상할 때는 말 그대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감상자는 그 소리에 반응하여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모차르트가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아마 음악에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음표를 그리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악보는 그 행위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결과물이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음악은 그 음표들의 집합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음표와 음표 사이에 발생하는 물리적 공간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조건을 포괄하는 말이리라. 음표들 사이에 있는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음악이라는 세계에 깊이 들어간다면 음표를 넘어선 진정한 음악의 힘을 마주할 수 있다고 모차르트가 말한 것은 아닐까.
『검은 바이올린』은 음악이 중심 주제가 되는 소설이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 세계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이들이 마주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에는 음악의 매력에 빠진 두 사람이 등장한다.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와 바이올린 제작자 에라스무스이다. 요하네스는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집시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결국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신동이라 불리며 수많은 곳에 연주 여행을 다닌 요하네스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연주를 중단한다. 그 대신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인생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그 꿈이 영글기도 전에 요하네스는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점령국의 한 민가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집이 바로 에라스무스의 집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혹되어 바이올린 제작자가 된 인물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이올린 제작을 배운 그는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의 꿈은 단순히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얼핏 봐도 닮은 구석이 많다. 어린 시절에 음악이라는 매력에 빠졌고 각자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으며 아주 비범한 인생 목표를 품었다. 음악을 통해 하늘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마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만난 시점에서 에라스무스는 목표를 이루었고 요하네스는 아직 도상 중에 있다는 점이다. 에라스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소름 돋게도 그 바이올린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난다. 에라스무스는 홀로서기를 한 이후 페렌치 공작의 딸인 카롤라를 위한 바이올린을 만들게 되었다.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는 서툴렀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 에라스무스는 카롤라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에라스무스가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그가 구현하고 싶었던 바이올린 소리이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목소리를 담기로 한다.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어 그녀에게 보여주기로 약속한다.
“카롤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 (p.138)
에라스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어낸다. 그 바이올린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카롤라의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카롤라에게 바이올린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그러나 카롤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목소리까지 잃었다. 망연자실한 에라스무스는 카롤라가 병들고 목소리를 잃은 것이 그 바이올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카롤라는 끝내 숨을 거둔다. 에라스무스는 이 이야기를 요하네스에게 전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과 같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에라스무스도 숨을 거둔다. 요하네스는 에라스무스가 겪은 일들과 그의 죽음을 듣고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에라스무스가 평생의 꿈으로 삼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이 요하네스 자신의 인생 목표인 ‘오페라 쓰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의 인생은 여러모로 닮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음악이라는 세계에서 하나로 연결된 사람(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음악적 영혼”)이 아닐까 하는. 에라스무스의 원죄는 음악을 소유하려 했던 것이다. 음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이 지나치면 소유하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음악은 소유해서도 안 되고 소유할 수도 없다. 음악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한 진정한 음악은 그만큼 광활하기에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와 닿아있는 듯하다. 음악이라는 세계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한 것 같다. 에라스무스가 소유하고자 했던 음악을 요하네스를 통해서 해방되도록 말이다. 요하네스는 오페라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서 머지않아 군에 입대했다. 요하네스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가 국가를 정복해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참상을 몸소 겪었다. 이러한 정복 행위는 마치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다.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을 요하네스는 전쟁을 겪으며 느꼈던 것일까. 그는 에라스무스가 죽고 나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오페라를 쓴다. 그것도 무려 31년 동안. 그러나 이 오페라 역시 요하네스의 꿈에서도 나왔던 카롤라의 목소리를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음표를 그림으로써 오페라 악보를 완성하지만 모든 작업이 헛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카롤라의 목소리와 닮은 사람만을 찾아다닌다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질지를 예감했던 것일까. 급기야 그는 악보를 불에다 던져 버린다. 악보는 불타 없어졌지만, 그날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둔다.
소설에서 에라스무스의 죽음과 요하네스의 죽음은 다르게 느껴진다. 생의 마지막까지도 ‘카롤라’를 부르며 애타는 마음으로 숨을 거둔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요하네스는 영혼의 평안함을 느끼며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그 평안함은 음악을 움켜쥐지 않으려는 마음가짐과 연결된 것 같다. 음악이라는 세계는 요하네스와 에라스무스가 같은 사람이건 음악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사람이건 풀지 못했던 숙제를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요하네스도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더 넓은 의미에서 음악으로 연결된 우리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기회를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모차르트가 말한 진정한 음악이라는 세계에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