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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ia님의 서재
  • 하얼빈
  • 김훈
  • 14,400원 (10%800)
  • 2022-08-03
  • : 33,186

빛의 이끌림에 응답한 사람

 

안중근을 둘러싼 케케묵은 논쟁이 있다. 바로 “안중근은 독립운동가인가, 테러리스트인가.”, 하는 논쟁이다. 그가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목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그것은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함부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대의명분이 우리 생각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안중근이 생명 존중을 제일로 여기는 천주교에 몸담았기에 그가 보인 행동이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훈의 『하얼빈』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치른 시기를 기점으로 전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작가가 말했듯이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상상에 의존하기에 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조사하였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대화나 장면 묘사를 썼기에 이야기에서 개연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안중근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영웅 안중근’만이 아닌 ‘인간 안중근’, 더 나아가서 ‘청년 안중근’마저 느끼게 해준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 수 있어서였을까, 이 책은 위에서 말한 논쟁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소설에는 문학적 메타포로서 ‘빛’이 등장한다. 안중근이 경험한 가장 강렬했던 빛 경험은 세례를 받을 때였다. 이 경험은 아들 ‘분도’의 젖니를 보았을 때 다시 떠오르는데 이는 빛이 생명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이 빛은 찬란함에만 머물지 않고 안중근의 환영 속에서 일제의 폭력에 스러져 간 백성을 비추기까지 한다. 이 빛은 생명의 환희뿐만 아니라 죽음의 엄중함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안중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이 빛으로 본다.

소설에는 또 다른 빛이 등장한다. 그것은 ‘메이지’라는 빛이다. 당시 황제의 연호인 ‘메이지’는 ‘명치(明治)’의 일본말이다. 여기서 ‘명’은 밝다는 뜻인데 이는 빛의 속성이다. 소설은 두 빛을 대비하면서 안중근을 ‘명치’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한다. 안중근은 왜 메이지라는 빛에는 이끌리지 않았을까. 진정한 것을 경험한 이에게 모조품은 하찮은 것이 된다. 이는 ‘인간은 빛 자체가 될 수 없다.’라는 깨달음과도 이어진다. 소설은 진정한 빛과 유사 빛의 대비를 통해 안중근이 행해야 할 과업의 근원적 동기를 밝힌다.

빛이 주는 생명의 힘을 억제하려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안중근을 문학적으로 추적한 끝에 나온 질문이다. 안중근은 그 억제하려는 행위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그 중단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p.273)


소설에는 유독 ‘되어진다’라는 수동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안중근은 빛이라는 힘에 반응했다. 작가는 숭고한 생명을 기뻐하고 무고한 죽음을 슬퍼할 줄 아는 힘을 '빛'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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