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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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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lo니
인생사진이니 하면서 여기저기 뻑적지근 화려하고 요란한 것 투성이인 세상이다.
가만히
살피고 생각해보면 인생이 다 한방짜리인 듯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
인생의 OOO이
왜 없겠나.
하지만
어쨌든 인생은 멋지고 요란한 한방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여기
요란함도,
화려함도,
뻑적지근함도
없지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있으니 우리의 문화유산을 더 자세하고 가깝게 살펴보며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는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성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하고 영남대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바 있는 유홍준 교수가 우리나라 유적지 곳곳을 다니며(일본
유적지도 일부 포함)
그곳에
얽힌 역사와 아름다움을 미학 전공자답게 전문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친절히 소개하고 설명한 글이다.
정말
유명한,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만한 책 중 하나일 정도인데도 정작 나는 한 권도 안 읽어본 책이 또 이 <답사기>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번 <답사기>
9편
서울편1편을,
그것도
서울의 조선시대 고궁 특집 편을-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궁이 집중적으로 다뤄지다니-첫
책으로 읽게 됐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국내 문화유산들에
갈 기회와 갔던 경험들은 모두 다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답사 경험이 있더라도 답사지에 대한 지식이 있냐 없냐에 따라 그 경험의 선명성과 감흥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마침
오래되진 않았지만 거주지 인근에 있는 수원 화성과 성인이 된 이후 스스로 찾아가 본 후 그 아늑함과 고즈넉함에 젖어들게 됐던 고궁들에 슬며시
빠져들던 참이었는데 그러한 주제로 <답사기>가
나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답사기>
9번째
책 서울편 1편은
서울 종로에 있는 종묘,
창덕궁,
창경궁을
중심 주제로 조선시대 건축물에 얽힌 역사와 건축 양식의 특징,
아름다움을
소소하게 풀고 담아 우리에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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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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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부로
구성된 본서의 첫 부를 장식하고 있는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종묘는
조종(임금의
조상)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전하께서는
천명을 받아 국통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서울을 정했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책에
소개된 세 곳 중 유일하게 못 가본 곳이 종묘다.
사진과
설명으로도 그 웅장함과 압도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겠지만(표지
사진으로 쓰인 종묘 모습은 차분함과 웅장함이 압권이다),
꼭
마음먹고 자유관람이 가능한 날에 그 웅장한 기운을 흠뻑 느끼고 와야겠다 마음먹었다.
종묘가 가진 매력과 가치는 단지
건축물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소중한 유산은 바로 종묘제례.
“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인 것이다.
그래서
종료재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악에 워낙 많지만
정작 국악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는 것 같다.
나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어느
땐가 태평소 소리를 눈 앞에서 듣고는 그 소리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기억이 있다.
그
후로 국악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커졌는데 종묘제례악은 국악의 범주에 넣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지만,
저자가
세세하게 묘사해놓은 글을 보며 종묘제례악을 눈 앞에서 보고 그 장엄함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종묘에서
행해지는 제례라 하여 흔한 제사의식이겠거니 하겠지만 저자의 말을 또 옮겨보면 ‘참관해보기
전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장엄한 의식이 종묘제례’라고
한다.
두
가지 숙제가 생겼다.
종묘를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과 종묘제례를 참관하며 감동을 경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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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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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궁에는 가본 적이
있다.
가장
대표적 궁인 경복궁.
한참
사진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사진
취미의 아이러니는 정작 담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그저 그럴듯한 시각적 흔적만을 남기려 한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경복궁에서의 뚜렷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
몇해 전 아내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다른 궁에 다녀왔고 그땐 궁이 지닌 넉넉함과 여유,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돌아왔다.
그곳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한국의 옛 건축물들을 보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멋스럽고,
단아하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저자도
바로 이 점을 얘기하는데 이는 이미 궁 건축에 녹아들어가 있는 철학이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궁원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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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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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말로만 듣다 작년 가을에
다녀오고 넓은 호수와 긴 산책길을 거닐며 창덕궁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꼈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속 시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왕의 직계존속이 생활하는 곳이어서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은 멀리 창덕궁 곁에 지었다고
한다.
창경궁
편에서는 영조와 정조의 애민정신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권위적이지
않은 궁궐의 모습에서부터 이를 느낄 수 있고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비교해서 보며 영조와 정조의 애민정신을 더 세심하게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그것을 핑계로 백성을 억압하거나 백성은 뒷전으로 두고 나라의 유익만을 앞세우는 모순적인 국정운영에 대해서 언제나 경계하며
영조와 정조의 애국 방법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창경궁에 있는 문정전은 2006년
한 차례 방화사건을 맞은 적이 있다.
그
때 관람객으로 있던 분의 순발력 있는 대처로 큰 불로 번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고,
방화범은
노령과 건물 피해의 경미함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러나
그 범인은 2008년
돌이킬 수 없는 숭례문 방화 사건을 다시 저지르고 말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전은 다만 문정전과 숭례문 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화제로 아픔을 겪었던 우리의 문화 유산들을 지금부터라도 더 소중히 여기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창경궁에는 아버지에 의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된 사도세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얽혀있다.
비록
아들의 목숨을 잃게 한 아버지이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뜻을 받들어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던 손자 정조의
이야기가 그나마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억압정책으로 창경궁이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동물원과 유원지로 사용됐던 역사는 생소하면서도 500년
조선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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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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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를 시작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에
얽힌 역사와 건축배경,
양식
설명을 들으며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던지 다 읽고 나니 긴장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답사기>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늘 빨리 끝내야하는 숙제처럼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는데,
시작이
반이라고 첫 한 권을 다 읽고 나름 마음이 후련하다.
<답사기>는
어떤 책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섣불리 손에 쥐지는 못했던 이상한 책이었다.
비록
이제 한 권이지만 <답사기>
첫
책을 읽어본 소감들을 적어보면,
저자의
전공덕분에 문화유산에 대한 고증과 미적 분석이 탁월하게 느껴졌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다시 한번(또는
여러번)
가서
보고 싶게 만드는 해설과 분석이었다.
또
책에 수록된 저자 본인이 찍은 사진들도 유적이나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유익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 고취다.
서두에도
얘기했듯이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정서는 뚜렷하고 선명하며 즉각적인 흥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옛 문화와 정서는 현재의 지배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스레
관심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관심이 떨어지고 그에 따라 자부심도 별로 느끼지 못한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해주고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것은 유익을 넘어 이 책의 예비
독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에게 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이 책을 읽고 유익을 얻은
독자로서 내가 해야 할 몫은 심드렁하게만 생각했던 국사와 문화유산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후 눈뜨게 된 우리 문화의 가치와 정서를 나의 관심
분야와 일상에서 실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서울편 1편의
부제목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를 마음에 새기고 책 속에 적혀있는 원문을 그대로 옮기며 글을 마칠까 한다.
만천명월주인옹-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만천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나의 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12월
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