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배를 뜯자마자 보이는 편안한 그림체와 시원한 색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두꺼웠다. 하지만 펼치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사실 중간중간 어떤 장면들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나는 해원이면서 진아였고 산호와 우진이 같은 친구들이 분명 있었다. 화려한 색과 그림체가 가득한 만화들만 보다가 간결하지만 따스한 그림, 충분한 여백을 담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
열세 살의 여름이지만 이야기는 여름부터 해가 바뀌고 14살의 이른 봄까지 다루고 있다. 1998년 여름, 해원이는 엄마 언니와 함께 아빠가 일하고 있는 바닷가의 한 도시에 잠시 머물게 된다.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있는 같은 반 선호를 만나게 되지만 선 듯 인사를 건네기 쉽지 않다. 같은 반이지만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는 서먹한 사이. 하지만 바람에 날아간 해원이의 모자를 선호가 주워주며 둘은 인사를 하게 된다. 그렇게 우연한 짧은 만남은 끝이 난다. 하지만 개학하고 난 후 방학 때의 기억을 그린 그림에서 해원이와 산호는 같은 바다, 비슷한 풍경을 그리게 된다. 만남은 찰나였지만 기억은 길었다. 해원이와 선호만 알고 있는 추억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로 해원이와 선호는 아주 천천히 친구가 된다.
1998년이라는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자물쇠로 잠갔던 비밀 교환일기, 컴퓨터가 생긴 친구 집에 우르르 놀러 가기, 비디오방에서 새로 나온 비디오와 만화책 빌려보기, 피아노 학원과 학원비 봉투, 몇백 원 내고 타던 봉봉. 이제는 사라진 것들이 해원의 삶에 스며들어있어 독자들은 잊고 살던 기억들이 소환되거나 자신의 13살과 비교해보기도 하며 그 시절의 학창시절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해원이, 진아, 산호, 우진이의 6학년 2학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기기는 어렵다. 산호와 해원이가 가까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귀신이 나온다는 폐가에서 만났을 때였다. 해원이와 진아도 학교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폐가의 귀신 체험은 알고 보니 산호가 살던 집이었다. 산호의 엄마, 아빠는 떨어져 계시고 산호는 혼자서 방학마다 바닷가 도시에 사는 아빠를 만나러 간다. 늘 차분하고 조용한 산호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집 사정이 있다. 이런 배경은 IMF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해원이도 부모님의 잦은 다툼을 목격하게 되고,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싶어도 (아마도) 어려워진 집안 사정 탓에 그만둘 수밖에 없다. 해원이의 반 친구의 아버지는 미국에 도망가있다는 장면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열세 살 만이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어른이 바라보는 열세 살은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놀거나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을 재미있게 다니는 해맑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이지만, 그때의 열세 살도 지금의 열세 살도 충분히 삶이 심각할 수 있는 나이이다. 우리는 모두 그 나이를 지나왔으면서도 날마다 쌓이는 삶에 무게에 어린 시절의 그것들이 마치 가벼웠다는 듯이 기억되고 미화되고 희석된다. 하지만 해원이도 독자들도 열세 살은 처음이었기에 은근한 친구들의 따돌림, 나를 좋아한다면서 자꾸만 괴롭히는 짝꿍, 첫 졸업, 첫 입학이 두렵고 걱정되고 힘들었다.
네 마음속을 괴롭히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마.
그 마음하고 막 싸우고 왜 그런지 물어보고 따져보고.
그래야 네가 거기서 배우게 될 거야.
341쪽
다양한 감정이 한 번에 휘몰아치는 순간들이 있다. 그 마음들을 다스리는데 여전히 서툰 열세 살의 해원이에게 아빠는 애정 어린 조언을 남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하나씩 배우게 되는 시절들. 새로운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들과 싸우고 묻고 따지면서 배우게 되고 성장하게 된다. 이런 성장은 어른이 된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 중학생이 된 해원이는 매일 새로움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들로 인해 때로는 힘들 수도, 때로는 행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세 살의 여름»은 네 인물의 성장만화라고 할 수 있다. 만화의 장점은 누구나 편하게 즐겨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 만화는 나이를 불문하고 책을 펼치는 독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줄 것이다. 청소년 독자는 책 속 인물들에게 공감하고 동감하며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성인 독자들에게는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책을 덮으며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21년이 지나 34살의 해원이는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해 읽게 되는 상상을. 해원이는 여전히 진아와 우정을 유지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을 수도 있다. 진아가 해원이에게 주었던 새와 물고기 모형처럼 떨어져 지냈어도 둘은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책을 계기로 해원이가 진아에게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전하기를. 카페에 앉아 산호와 우진이를 떠올리고, 열세 살의 자신들을 추억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해원, 진아, 산호, 우진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아마 독자들처럼 이들도 여전히 어색한 어른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 매일 싸우고 묻고 따지며 성장하고 있지 않을까.
일상 속 잠깐 휴식이 필요할 때, 그리고 여름마다 책장에서 꺼내 읽어보게 될 책,
이윤희 작가의 만화, «열세 살의 여름»이었다.
덧) 에필로그 절대 놓치지 말 것! 과묵한 산호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너 열세 살 맞구나!


네 마음속을 괴롭히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마.
그 마음하고 막 싸우고 왜 그런지 물어보고 따져보고.
그래야 네가 거기서 배우게 될 거야.- P341
네가 인연이란 말 했을 때 난 그게 뭔 말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좀 알 거 같아. 네가 예전에 준 물고기랑 새 기억나? 물고기는 물에 살고 새는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난 걔네들이 친구처럼 보였어. 그러니까 나는 네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P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