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세게 밀치는 거 아니야?”
병은 씨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그 청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라는 것을. 키가 큰 청년은 바퀴벌레 보듯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라는 위압감마저 묻어난다.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그의 묵직한 팔이 병은 씨의 머리위로 살짝 올라간다. 병은 씨는 반자동적으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린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요량으로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모두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멍하니 앞을 바라보거나, 아침 출근길 특유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다. 병은 씨를 거들어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병은 씨는 다리에 힘이 쫙 빠진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현기증마저 일어 세상이 빙빙 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힘껏 손잡이를 붙든다.
“더러워.”
젊은 여자가 청년의 품으로 파고들며 병은 씨를 노려본다. 그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서 병은 씨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때 병은 씨의 머리를 누군가 툭툭 친다. 세게 내려친 것은 아니지만, 생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기분 나쁘게 살짝살짝 그녀의 머리를 누군가 계속 건드린다. 병은 씨는 눈을 더 질끈 감는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머리를 조아리며 얼굴을 잘 들지 않는 편이다. 나이 많은 게 자랑도 아니고, 괜히 보잘 것 없는 것이 젊은이들의 앞길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봤자 이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이 그녀를 거칠게 밀칠 때, 그의 애인이 그녀에게 더럽다는 말을 뱉을 때,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서는 병은 씨의 감정적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 병은 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린다. 숨이 막힌다.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물을 먹고 싶다. 차가운 냉수를 한 컵 들이키면 좀 나아질 거 같다.
‘지하철에서 부딪힐 수도 있지.’
병은 씨는 반성한다. 사람도 많은데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다고.
'그 아이들이 화를 낼만도 했어.'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던 커다란 손길은 견디기 힘들다. 그녀는 그것만은 결코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리를 조아리며,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병은 씨도 어엿한 시민이다. 지금까지 세금을 밀린 적도 별로 없다. 그녀에게도 폭력과 조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지하철이 한 대 무심히 지나간다. 그냥 떠나보낸다. 다음번 지하철이 왔을 때, 그녀는 고귀한 생계를 위해서, 어미로서의 책임감으로 지하철을 다시 탄다.
하늘국제공항의 높은 천장은 마치 신전 같다. 때로는 엄숙한 느낌마저 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병은 씨는 서둘러 짙은 하늘색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우선 병은 씨의 담당구역 쓰레기통을 비운다. 쓰레기통에 넣어놓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통째로 꺼내고 새 걸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한 시간 정도 분주하게 이 쓰레기통에서 저 쓰레기통으로 옮겨 다녀야 일을 다 끝마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에스컬레이터 바를 걸레질해야 한다. 그녀는 총 2대의 에스컬레이터를 맡고 있다. 화장실도 아니라, 꼭 지하 주차장 구석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걸레를 빨아서 해야 한다. 하늘국제공항을 이용하는 내외국인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환경미화원들을 교육하는 관리가 말했다. 힘을 빡 주고 에스컬레이터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면 팔이 무척 아프다. 그렇다고 파스 값이 아까워서 파스도 잘 붙이지 않는다. 그냥 참고 한다.
한참 청소를 하다가, 아까 지하철에서 마주친 젊은 커플 생각이 나자 병은 씨는 부아가 치민다. 그러면서도 순리대로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자리를 내주는 것이 맞건만, 환경미화원 주제에 왜 짜증을 냈던 것일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그건 도덕도, 질서도, 규칙도 아닌 거 같다. 거의 아들, 딸에 가까운 아이들이다. 환경미화원이라고 해서 그렇게까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쓰라린 마음을 끌어안고 병은 씨는 점심을 먹으러 간다. 하늘공항의 다른 직원들은 직원식당을 사용하지만 환경미화원들은 거의 직원식당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 끼에 오천 원 정도 하는 식대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병은 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환경미화원들이 그렇다. 그녀들은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보일러실로 향한다.
삼삼오오 동료들이 모인다. 김치나 단무지 같은 반찬 한가지씩에 밥을 꺼내놓고는 한다. 종이상자를 잘라서 그 위에 꺼내놓고 함께 먹는다. 가장 마음 편안한 시간이다.
하지만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병은 씨는 오늘은 계속 목이 막힌다. 보통 때보다 두 배 정도의 많은 물을 마신다. 밥도 물에 말아 거의 마시다시피 한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들 준다고 붕어빵 천원어치를 산다. 불이 켜진 허름한 빌라의 문을 연다. 남편도, 아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고 바닥에 몸을 뉜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붕어빵을 한입 베어 문다. 따뜻한 팥이 물컹하게 씹힌다. 달콤한 팥을 음미하며 병은 씨는 찔끔 눈물을 흘린다.
25년차 주부의 근성을 발휘해서, 일어나 불을 켠다. 청소를 한다. 조그만 주방과 두 개뿐인 조그만 방에 흩어져 있는 옷이며 잡동사니들을 정돈한다. 설거지도 한다. 설거지를 하며 그녀는 자신이 음식물찌꺼기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남의 뒤치다꺼리만 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녀의 인생은 타인의 배설물을 치우고 정돈하는 것이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담겨져 썩은 국물이 줄줄 흐르는 음식물쓰레기가 자신과 가장 닮은 거 같다.
‘보잘것없는 년. 혼자서는 의미도, 가치도 가질 수 없는 년. 널리고 널린 차돌멩이 같은 년.’
끼이익. 골동품 같은 철제문이 운다. 아들이다. 복학하기 전에 사회생활 연습도 하고, 한 푼이라도 더 보탠다고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착실한 아들이다.
“창준이, 밥 먹었니? 엄마랑 밥 먹을까? 뭐 해줄까? 떡볶이 먹을래?”
“오다가 먹었어. 엄마나 챙겨 드세요.”
“우리 아들, 무슨 일 있어?”
병은 씨는 아들이 조금 이상하고 느낀다. 창준이는 한 마디 던지고는 방으로 쏙 숨어버린다. 병은 씨는 창준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건장한 창준이는 뭔가 분이 덜 풀렸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린다.
“아들……. 엄마 좀 봐줘.”
병은 씨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아들은 귀찮은지 몸을 흔들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친다. 아들의 어깨에서 모래가루가 만져진다. 그리고 약간 비릿한 피 냄새가 아들의 방에 통통 번진다. 엄마가 피 냄새를 알아챘음을 알았는지 아들은 그제야 몸을 일으킨다.
“나 좀 씻고 올게. 떡볶이 해줘. 조금만 해서 국물에 같이 밥 말아먹자.”
병은 씨는 떡볶이 떡을 물에 헹구고 오뎅을 썬다. 창준이가 떡볶이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항상 떡볶이 떡과 오뎅은 끊이지 않게 사다놓는다.
창준이는 부모의 형편을 아는지, 군대에서 세상의 무서움을 알았는지 제대하고선 비싼 거 사달라는 말은 일절하지 않는다. 착실히 아르바이트해서 번 몇 푼 안 되는 돈도 거의 다 병은 씨에게 준다.
입술이 터진 창준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창준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떡볶이를 먹는다.
“싸웠니?”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술 먹고 몇 번 해롱대며 집에 들어온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부모의 기대를 무너트릴 만큼 큰 사고를 친 적은 없다. 누군가 아들을 건드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물어볼 수가 없다.
“누구랑 그랬어?”
“됐어. 떡볶이나 먹어.”
“엄마가 누구랑 그랬냐고 물었잖아.”
“누가 그랬는지 엄마가 알면 어쩔 건데. 가서 따질 거야? 고급승용차 타는 사람들을 우리가 당해낼 수 있어? 엄마, 우리 이사 한두 번 다닌 거 아니잖아. 고작 조그만 방 세 놓는 주인집 사람한테도 벌벌 떨면서 살잖아. 엄마가 뭔데. 엄마, 환경미화원이잖아. 엄마가 어떻게 할 건데. 아빠는 또 어떻고. 아빠는 경비원이잖아. 나는 정비공 연습생이고.”
아들의 말이 틀리진 않다. 다 맞는 말이다.
아침부터 참아왔던 병은 씨의 감정이 펄펄 끓더니 결국 흘러넘친다. 찔끔 눈물이 아니라, 밥상 앞에 아들을 놓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만다.
“그래. 알아.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아들. 엄마는 아들을 너무 사랑해. 우리 가족은 사랑하니까 행복한 거야.”
그녀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다. 무능력하고 가난함으로 피고인 자신을, 변호해줄 친구 하나 갖기 힘든 자신을 스스로도 변호하지 않는다.
지하철은 변함없이 움직인다. 지하철이 생긴 이래로 항상 그렇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사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파업하다가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자살을 해도 별로 변하는 건 없다. 병은 씨는 그렇게 죽어간 이웃사촌을 떠올린다. 그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병은 씨네 세 가족은 경비, 청소, 정비 아르바이트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입에 풀칠 할 정도로는 살고 있다. 살아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세상이 허락한 것은 인생이 아니라 생존이지만, 자살을 택했던 이웃사촌에 비하면 낫다. 병은 씨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오늘은 전용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전용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포기하기로 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면서도 꿋꿋이 지켜온 직업정신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지만, 그걸 지킬 용기가 이제 없다.
대신 촌스럽지만 화려하게 화장을 했다. 공항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충분히 쓰고도 남을 물건을 주을 때가 있다. 그녀는 주로 그런 물건을 사용한다. 오늘 바른 립스틱도 공항 쓰레기통에서 주은 것이다. 유행이 좀 지난 흐린 브라운 계열의 색이기는 하지만 꽤 유명한 브랜드다.
병은 씨가 처음부터 환경미화원 일을 했던 건 아니다.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난 병은 씨는 공부를 꽤 잘했던 수제였다. 집안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그녀를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음반 제작 공장에서 일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피해주지는 말자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아들을 낳고는 동네에 아주 작은 화장품 가게를 차렸다. 남편은 카센터에서 일했다. 순탄한듯했다. 그러다가 IMF라는 복병을 만났다. 그녀의 화장품 가게는 남의 것이 됐다. 남편이 잘 다니던 카센터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전세로 살던 아파트도 빼야했다.
둘은 적게 벌어도 밑천이 안 드는 일을 택해 연명하기로 맘을 먹었다. 병은 씨는 젊었을 적 경험을 살려 간병인으로 일하고, 남편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병은 씨는 젊은 조선족 출신 간병인들에게 밀리면서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하늘공항 환경미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들 하나 공부시키며 세 식구가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병은 씨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공통점이 신분의 하락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걸 알 정도로는 배웠다. 병은 씨는 가끔 서글프다. 그녀도 꿈 많은 소녀였던 적이 있다. 터질 것 같은 꿈을 안고 홀로 서울로 상경했던 기억이 있다.
젊고 아주 예쁜 여자아이가 지하철에 탔다. 검정색 초미니 스커트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일견 회사원 같기도 하지만, 회사원치고는 그녀의 화장이 너무 짙다.
“네. 피디님이 열시까지 오라고……. 음. 네. 대사 연습은 충분히 했어요.”
통화 내용을 들으니 배우인 모양이다.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대중성이 강한 작품인지, 예술성이 짙은 작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제 막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 풋풋한 기운이 솔솔 풍기는 아이다.
병은 씨는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어렴풋한 꿈을 잠시 품었던 것이 기억났다.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어제 지하철에서 젊은 커플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다가 맞고 들어온 것을 보자 갑자기 땅이 꺼지듯이 모든 것이 가라앉아버렸다.
병은 씨는 이제라도 그녀의 인생을 되찾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버림받고, 양보할 것을 강요당해온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맞춰놓고 싶다. 그녀가 품었던 푸른 꿈들을 이제라도 조금씩 일궈나가고 싶다. 원래 나의 것이어야 했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병은 씨는 맘을 단단히 먹었다.
‘남편 잘 보살피고 아들도 잘 키웠잖아. 이 정도면 국가에 공까지는 아니어도 도움을 준거야.’
텔레비전에서 봤다. 숙주의 의식을 장악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외계 생명체가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 외계 생명체가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병은 씨는 점심시간에 하늘공항 화물구역으로 갔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풋내기 배우인 여자아이를 본 후 막연히 그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니 그녀도 신기하다.
체크무늬가 있는 부드러운 천 재질의 커다란 여행가방 앞에서 멈춘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준비해온 쓰레기봉투에 여행가방 안에 있던 물건을 모두 꺼내 담는다. 가방에 있던 물건이 담긴 쓰레기봉투는 화물구역 쓰레기통 옆에 놓는다. 지나가던 공항 직원이 쓰레기봉투를 옮기는 그녀를 본다. 하지만 일상적인 청소 업무를 하는 것이려니 하며 언제나처럼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녀를 지나친다.
여행가방 앞으로 돌아온 그녀는 우유 한 개와 빵 두 개가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환경미화원 복장 그대로 여행가방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머리핀을 이용해 지퍼를 움직인다. 안에서 가방을 잠근다. 워낙 큰 여행가방인지라 공간은 넉넉하다. 천 재질이라 숨을 쉬는 데도 불편함이 없다.
그녀는 만족한다. 엄마의 자궁 속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곤한 잠에 빠져든다.
병은 씨는 다리가 아파서 눈을 뜬다. 쪼그린 다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손으로 종아리를 주물럭거린다. 좁은 공간이지만 다리를 앞으로 살짝살짝 뻗어본다. 바깥쪽을 향하게 손바닥을 깍지 끼고 위쪽으로 당겨 올리기도 한다.
검정색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빵 한 개를 꺼내 먹는다. 우유를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화장실에 갈 수 없는지라 목마름은 참기로 한다.
푹 자고 배도 든든해지자 병은 씨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후회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평생 양지바른 길로만 다녔어. 가끔은, 아니 난생 처음으로 비탈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어.’
어제의 잊고 싶은 사고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남은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런 모험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당당한 엄마이자 아내로 그들과 함께하고 싶기도 하다. 여자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를 잘해도 대학도 못 간 처지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가.
‘나도 할 수 있어.’
커다랗고, 텅 빈 터널에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처럼, 웅웅웅, 소리가 들린다. 비록 여행가방 안에 있지만, 정말 하늘을 날고 있나보다 싶다.
병은 씨에겐 비행기를 타는 게 처음 있는 일이다. 신난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병은 씨가 확인한 게 확실하다면 이 비행기는 프랑스 파리로 간다. 프랑스 파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병은 씨는 몸서리쳐지게 좋다. 비록 아직도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감당이 안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병은 씨는 자신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느낀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의 흐름 속에 올라타고 인생을 온전히 자신의 욕망대로만 조종하고 있다.
정오 즈음, 창준이는 점심 먹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난다. 엄마의 쪽지를 발견한다. 싱크대 앞, 상에 된장찌개와 계란말이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하얀 백지 위에 검정색 볼펜으로만 눌러쓴 편지다.
‘사랑하는 아들. 엄마의 아들이어서 고마워. 엄마가 아들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엄마, 아빠가 못나서 아들 더 좋은 것도 못해주고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 아빠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아빠도 미워하지 마. 아빠가 돈 못 벌고 싶어서 못 버는 거 아니잖아. 아빠는 항상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짓 하지 않았고. 착실한 가장이잖아. 엄마는 아빠도 진심으로 사랑해.
엄마는 잠시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볼 참이야. 당당한 엄마로 아들 앞에 서고 싶구나. 그래야 앞으로 우리 가족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가지. 아들은 지금처럼만 해줘. 엄마는 어떻게든 엄마 나름대로 활로를 찾아볼게. 솔직히 엄마가 뭘 어떻게 한다고 크게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니.
아들이 제대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해서 엄마는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고마워. 우리 가족 힘내자.’
병은 씨는 자신이 들어있는 가방이 움직인다는 걸 느낀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가기 전에 끌로델공항 화물구역에서 나와야 한다.
병은 씨는 머리핀을 이용해 밖을 볼 수 있도록 지퍼를 약간 위로 올린다. 병은 씨가 들어있는 가방 위로 다른 가방이 몇 개 올라간다. 옷가지들만 들어있는 가방들인지 다행히 견딜만한 무게다. 사람들의 다리가 보이고, 비행기의 다리도 보인다. 병은 씨는 여행가방과 함께 공항용 컨테이너로 빠르고 신속하게 옮겨져 분류된다.
여행가방의 지퍼를 내리고 병은 씨는 우유를 마신다. 곧 화장실에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젠 목마름을 참지 않아도 된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도 다듬는다. 주머니에 넣어둔 십 만원도 확인한다. 하지만 파리에서 십 만원 갖고 어떻게 여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그저 예술의 나라를 향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맹추.’
병은 씨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여행가방의 주인은 입을 수도, 섭취할 수도 없는 환경미화원 아줌마를 발견하고 경악할 것이다. 병은 씨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일단 끌로델공항 환경미화원인 척 하자.’
하지만 한국도 아니고, 하늘공항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끌로델공항에서 어떻게 드라마 피디나 영화감독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녀는 맘 착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머리핀으로 지퍼를 다시 올린다. 내다보니 사람들이 다른 화물을 나르기 위해 한쪽에 몰려있다. 그 틈을 타 얼른 가방에서 나와 화물 더미 뒤로 몸을 숨긴다.
오랫동안 가방 속에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다. 눈치를 보다가 씩씩하게 몇 발자국 앞으로 걷는다.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화물구역에서 나와 쓰레기통을 찾는다. 쓰레기통 옆에 서니 마음이 놓인다.
유리천장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하늘공항에 비하면 한결 여유로운 풍경이다. 사람들의 표정도 훨씬 느긋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달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사람들 속으로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간다. 푸른색 환경미화원 작업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긴 하지만 크게 불편해하진 않는 눈치다. 병은 씨는 프랑스인들 사이에 섞이자 마음이 놓인다.
‘일단 뭘 먹어야겠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가로 내려간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간판이 즐비하다. 병은 씨는 파스타와 커피 사진이 걸려있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파스타와 커피를 먹고 싶다. 병은 씨의 형편에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파스타도 먹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이들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제 지하철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겁부터 났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간다.
“학생들, 한국인이야? 내가 한국 돈밖에 없는데 저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네. 프랑스 돈 있으면 좀 시켜줄 수 있어?”
젊은 학생들은 환하게 웃으며 아줌마를 바라본다.
“물론이죠. 저희도 파스타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래도 돼? 보다시피 내가 학생들 밥을 사줄 수는 없고, 대신 내가 내 거는 낼게. 한국 돈 줄게. 파스타랑 커피 한 잔만 시켜주라.”
“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저희 프랑스 처음이에요. 오자마자 한국 분을 만나서 저희도 좋네요.”
학생들은 연신 싱글벙글 웃는다. 착한 아이들인 것 같아 병은 씨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만원을 주자, 학생들이 조갯살과 야채가 곁들여진 크림파스타와 원두커피 한 잔을 갖고 온다. 포크로 크림파스타를 말아 한 입 먹자 여행가방 안에서 보낸 피로가 확 풀린다. 옅은 향이 매력적인 따뜻한 원두커피도 한 모금 삼킨다. 세 명의 학생들은 웃으며 파스타와 샌드위치, 생과일주스 등을 먹으며 떠든다.
“아줌마는 여기서 일하세요?”
한 남학생이 병은 씨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일? 응. 아주 중요한 일이지.”
병은 씨는 묘한 웃음을 흘린다. 남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먼 곳을 쳐다본다.
제복을 입은 외국인 사내와 검은 머리의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실례합니다. 한국인이시죠?”
검은 머리의 여인이 밥을 먹고 있는 병은 씨와 학생들에게로 다가와 묻는다.
“서울에서 온 여객기 손님의 여행가방의 내용물이 모두 사라지는 사고가 발생했어요. 신고가 접수돼서 끌로델공항 보안과에서 탐문 중이예요. 전 통역사이고요.”
제복은 입은 프랑스인 사내가 통역사에게 뭐라고 말한다.
“사모님은 이 학생들 보호자이신가요?”
“그건 아닌데요.”
병은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다. 학생들도 어리둥절해한다.
“끌로델공항 보안요원이 간단한 조사를 하기 위해 잠깐 동행해 시간을 내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네요.”
병은 씨는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말한다. 이어 먹던 음식을 마저 먹고 같이 가겠으니 식당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한다.
“아줌마, 괜찮으신 거예요?”
“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어. 괜찮아. 학생들, 먹던 거 먹어.”
병은 씨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남은 크림파스타와 커피를 모두 먹는다.
“아줌마. 비자 없으시죠? 불법 밀입국이시네요. 어떻게 오신 거예요?”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나온 한국인 직원은 짜증스러운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병은 씨를 바라본다.
“특별히 끌로델공항에 우리에게 신원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프랑스 정부에서도 크게 불만은 없는 거 같습니다. 전과도 없으시고, 마약이나 그런 것도 없으시고. 혹시 위장 같은데 비닐로 포장한 마약 넣어서 오신 거 아니죠? 엑스레이 결과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사장님.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저 같은 게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국으로 송환되시면 경찰 조사를 받으셔야 해요. 아마 징계도 따를 겁니다. 아줌마의 행위는 분명히 위법이니까요.”
병은 씨는 고개를 숙인다.
“그나저나 어떻게 오셨어요? 복장을 보아하니 환경미화원이신 거 같은데, 기내 청소하시다가 내릴 때 못 내리셔서 같이 오신 건가요? 아줌마가 끌로델공항에 도착할 즈음에 한국인 승객의 가방에서 물건이 다 사라졌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시는 건요? 전 대사관 직원일 뿐이지만 기본적인 조사는 저희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별 탈 없이 아줌마의 신원을 인도받아서 본국으로 송환시킬 수 있어요. 협조해주셔야만 해요.”
“그게……. 여행가방 내용물은 제가 건드린 게 맞아요. 그 가방 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화물대신 제가 온 거죠. 전 전라도 구례 출신인데요. 젊을 때 서울로 오면서 여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프랑스에서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가방에 아줌마가 들어가셨다고요?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특이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
“행동의 동기가 악의적이시진 않네요. 다만 입출국법을 어기신 것과 가방 안 물건에 대한 절도죄는 피하실 수 없을 거예요. 프랑스에 가면 젊었을 적 꿈인 여배우가 될 수 있을 거 같으셨다…….”
그는 낄낄거리며 웃는다.
“재미있네요. 그 꿈 꼭 이루셨으면 좋겠는걸요. 아까 직업은 하늘공항 환경미화원이라고 하셨고……. 음. 이제 좀 전체적인 상황이 이해가 되는군요. 한국 경찰이 향후 조사할 때 악의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이 참고사항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치하겠습니다. 대사관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할게요.”
“어이쿠. 고맙습니다.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데요. 나이 들어서 살짝, 아주 잠깐 치매가 왔는지.”
“하지만 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프랑스에 오시고 싶거나, 여배우가 되고 싶다면 다른 경로로 하셔야 해요. 이런 경로로는 두 번 다시는 안 됩니다. 이건 아줌마를 위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은 끌로델공항 보안과와 프랑스 경찰청 관계자를 만나고 오겠다며 방을 나간다.
병은 씨는 자신의 모험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너무 시시하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너무 대책 없음에 반성한다.
대사관 직원이 돌아온다.
“행정 절차가 끝나는 이삼일 동안 대사관에서 지낸 다음에, 서울로 가는 비행기로 추방되는 형식을 취할 거 같아요.”
창준이는 경찰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창준이는 기겁한다. 단 한 번도 사고 친 적이 없는 엄마다.
‘엄마가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창준이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슬펐다. 마음이 아팠다.
엄마와 아빠에게 보다 편안한 집과 여행 등, 해주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창준이는 눈물이 나는 것을 주먹으로 쓱 닦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카센터에서 창준이는 또 한 번 놀란다. 텔레비전 뉴스에 엄마가 나오고 있다.
“하늘공항 소속 환경미화원이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 여행가방 속에 들어가 프랑스행 비행기에 탔다가 귀환 조치됐습니다. 이 환경미화원은 악의적인 의도가 없고 초범이라는 점 등으로 기소유예 조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창준이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또 하나의 고난이 닥쳐올 것 같아 답답하다.
‘이 시련은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창준이는 아빠와 통화했다. 잘 해결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말하는 아빠의 말에 겨우 힘을 얻는다.
혼자 집에 들어온 창준이는 낡은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엄마의 기사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클릭했다. 하늘공항으로 막 들어온 엄마를 직접 인터뷰한 기사이다. 엄마의 그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기사에 의하면 엄마는 그런 행동을 했던 그간의 심정을 토로한 뒤, 불콰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통은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먼저 찾아갑니다.”
그런데 창준이는 기사 밑에 달린 리플들에 더 놀란다. 악플이 아니라 거의 다 선플이다. ‘아줌마, 힘내세요.’, ‘정말 왕 멋진 아줌마이시네요.’, ‘우리 환경미화원 아줌마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합시다. 저도 반성하게 되네요.’ 등의 리플들이 많은 추천을 받고 상위에 링크돼있다. 창준이는 엄마 기사에 달린 리플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늘공항에 도착한 병은 씨는 경찰청으로 이송돼 간단한 조사를 받고 인근 구치소에 수감됐다.
심사결과를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지난 며칠을 되돌아본다. 참 무모했다. 남편과 아들 생각도 났다. 미안했다.
저녁쯤에 사회봉사활동 50시간에 기소유예라는 심사결과를 통보받았다. 구치소 직원이 내일 아침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어둠이 찾아들고, 구치소는 적막에 휩싸인다. 싸늘한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눕지만 병은 씨는 쉽게 잠을 잘 수 없다. 난생 처음 온 구치소에 적응이 안 되기도 했지만 사회봉사활동 50시간을 할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다. 하늘공항 일자리도 잃을 것만 같다. 그러면 또 어딜 가서 무얼 해야 할까. 아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갖기로 한다.
병은 씨는 구치소의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려오는 풀벌레의 낮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잠이 든다.
구치소의 아침식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역국에 부서질 것 같은 밥을 말아 병은 씨는 덜 깬 정신으로 꾸역꾸역 아침을 먹는다. 끌로델공항의 크림파스타와 원두커피가 그립다. 끌로델공항의 음식 같은 건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울적하다.
겨우 배를 채우고 구치소를 나온 병은 씨의 눈에 쓰레기통이 눈에 띈다. 병은 씨는 습관적으로 쓰레기통에 다가간다. 편안하다. 누군가 병은 씨를 부른다.
“저……. 오병은 씨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맞대. 전 나라일보 김형진 기자라고 하는데요.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수첩을 든 몇 명의 기자들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방송국 카메라도 다가온다. 병은 씨는 어안이 벙벙하다. 기자들의 질문에 정신없이 답변을 하고 있는데, 색종이 플래카드를 든 여학생들이 두부를 들고 병은 씨에게 다가온다. 여학생들이 든 플래카드에는 ‘아줌마의 고운 꿈, 우리가 지켜드릴게요’라고 적혀있다.
“네. 아줌마. 네. 거기요.”
감독은 병은 씨가 기차역 표지판 앞에 서자 만족스러워한다.
병은 씨는 스타가 됐다. 온라인에 작은 규모의 펜클럽도 생겼다. 사회봉사활동을 마치자, 단편영화계에서 꽤 알아준다는 한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병은 씨에게 자신의 단편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제의했다. 병은 씨는 잠시 생각한 후에 흔쾌히 승낙했다.
“오랜만이네. 잘 있었니? 난 결국 널 떠날 수가 없구나.”
여주인공인 병은 씨가 기차역 표지판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다.
“고통은 가장 약한 존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가봐.”
감독은 하늘공항을 통해 막 귀환한 병은 씨가 했던 그 말에 반했다. 그 말만큼 인간의 본질적인 아이러니와 슬픔을 드러내주는 말도 없다고 병은 씨에게 말했다. 감독은 병은 씨에게 그 말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넣어도 되냐고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라고 그랬다.
“자기 곁에만 머물러달라던 그도 떠나버렸어. 이제 혼자 다시 시작해야 해.”
파란색 환경미화원 복장이 아니라 흐린 분홍빛의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은 병은 씨는 나직하게 대사를 읊는다.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그녀의 일상에 가깝다. 그녀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대본에 있는 대사를 대충 외워 말하기만 할뿐이다.
“타고 나셨어요.”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되어달라며 좋아라한다. 병은 씨는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감독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들 같은 젊은 감독이 좋아하자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줌마. 아니. 배우님. 점심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할까요?”
<환승역>의 첫날 촬영을 마친 병은 씨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들에게 준다고 붕어빵 천원어치를 산다.
붕어빵 하나를 베어 문다. 끌로델공항에서 먹었던 크림파스타 생각이 난다. 조갯살이 들어있던 부드러운 크림파스타……. 하지만 병은 씨는 지금 먹고 있는 붕어빵이 그 크림파스타보다 맛있다고 생각한다. 발걸음이 경쾌해지며 약간 빨라진다. 누가 보면 주책이라고 할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집에 도착한 병은 씨는 아들을 위해 떡볶이를 만든다. 떡볶이 떡을 물로 헹구고 오뎅을 썬다. 떡볶이 떡과 가지런히 썬 오뎅을 냄비에 넣고는 노곤해서 싱크대 옆에 눕는다. 여행가방 안에서 잤던 몇 시간의 잠이 떠오른다. 병은 씨는 이내 잠이 든다. 꿈속에서 꽃잎이 흩어지는 봄날의 공원을 걷는다. 손을 뻗어 꽃잎을 잡는다. 떨어지는 꽃잎들을 제치며, 공중에 뜬 커다란 붕어빵이 꼬리를 실룩샐룩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