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절한 시기에 주인을 찾아온 특별한 선물 - 순 우리말 사전 >
기역, 니은, 디귿,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얼마만에 읽어보고 써보는 말인지. 하핫.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리을이 없다.
이 책에는 리을로 시작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편집하신 분의 의도일까? 아니면 사고일까? 후훗. 아무튼 이것을 안 후 나는 이 책이 더욱 좋아졌다.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역시 빈틈이 있어야 정감이 느껴지나보다.
순 우리말 사전이 내게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따로있다.
영어교육이 대세인 요즘, 영어전담이 내게 맡겨졌다.
그것도 원어민 보조교사와 함께.
영어의 사막을 걷는 내게 순 우리말 사전은 단물과도 같은 선물이었다.
'그래, 너 주인 제대로 찾아왔구나. 반갑다~'하며 받자 마자 나는 책을 쫙 펴들었다.
첫번째 보인 쪽은 "잠의 종류"였다. 나비잠, 노루잠, 말뚝잠, 발칫잠, 헛잠 등등.
책을 다 읽도록 나를 계속 미소짓게 했던 그림과 설명이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경험해보았을 잠의 종류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첫 조카의 사랑스럽던 나비잠, 예민하던 날의 노루잠, 피곤한 주말의 개잠, 식구 많은 친척집에서의 발칫잠, 아빠가 안아다가 침대에 재워주는 게 좋아서 마루 바닥에서 자는 체 했던 헛잠. 모든 추억들이 떠오르며 행복이 밀려들었다.
사이 사이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있는 종류별 우리말들부터 싹 읽고나니,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은 마냥 배가 불렀다. 그래도 본문이 궁금하여 관심가는 단어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예쁘고 적절할까.
원어민 보조교사와 같이 지내며, 이럴 땐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나? 저럴 땐? 이런식으로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시간이 갈 수록 느끼는 건 우리말이 풍부하고 섬세하며 맛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말들을 알았다면 나의 언어생활은 더욱 풍부해졌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의 짝꿍에게도 가끔 하나씩 문제를 내본다. 재미있는 이야기 시간이 된다.
이 책은 즐거운 식탁이다. 다른 어른들에게도 그럴까? 문득 궁금하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