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조간에 실리는 칼럼을 미리 읽어보았다. 경향신문의 기획연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에 기고된 김우창 교수의 글이다. 김교수는 같은 지면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는지라 '지식인 현실참여'의 의미를 짚어보고 있는 기고문을 이 기획기사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는 건 낯설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난 30여년간 한국사회에서 문학평론가로선 아마도 백낙청 교수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온 분이지 않나 싶다. 그는 아래의 글에서 지식인의 현실참여, 지식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본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되새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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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05. 0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1. 지식인 현실참여, 그 복합적 의미
플라톤의 이상국은 지식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근대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 지식인은 중요한 선동자 또는 매개자가 되었고, 공산주의 정권에서는-정권의 관점에서 저울질하여-바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통치자 그리고 정치의 수임자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특히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바른 도덕의 정치는 정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이상의 수호는 학문하는 자의 주요 사명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위치는 이러한 유학 전통의 학자,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의 참여 지식인, 그리고 현대사의 민족의 수난에 대처한 애국지사들의 모델로서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이나 공자가 생각한 것이면서 거기에 저항적이고 비판적 기능이 첨가된 것이다. 현대국가는 이외에도 성격을 조금 달리하는 전문지식의 보유자-정책과 행정 연구자, 전문 관료, 그리고 기업 경영인, 근래에 와서 첨단과학기술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전문적 지식인의 필요는 날로 더 절실한 것이 되어 간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을 말할 때, 그것은 대체로 이러한 전문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 필요의 테두리에 영향을 미치는 더욱 전통적인 의미의 참여 지식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 지식인의 역할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 지식에서 온다. 이들 지식인은 자신의 역할을 어떤 전문지식에 의해서라기보다 특별한 정치 이상과의 관계에 의하여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정치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상을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 어떤 이상이 하필이면 특별한 지적 노력의 소산인가? 정치이상은 정치적 삶 일체를 하나로 통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사회의 현대적 발전의 한 의미는 바로 사회공간에서 삶의 통괄을 위한 이상이나 목적의 영역을 줄이고 삶의 수단의 신장을 위한 활동의 폭을 넓힌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적 부재의 사회에서 이러한 일반적 지식인의 기능은 모호하다. 목적의 부재는 사회적 아노미 그리고 사회의 불균형 발전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지식인을 사회참여로 끌어낸다. 또 많은 사회에서, 수단-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삶의 수단을 에워싼 갈등은 분배의 정의를 강력한 사회적 쟁점이 되게 한다. 정의는 전통 사회에서도 그 자체로 목적의 성격을 가졌었지만,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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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에 이끌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동기의 하나는 억제할 수 없게 솟구쳐 나오는 원천적 정열로 보인다. 이 정열은 정치질서의 구성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다. 모든 에너지는 명암을 가지고 있다. 정열의 인간은 강한 성격의 인간이다. 정치적 정열은 외고집, 독선, 그리고 전체주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정열에서 나오는 정치 참여욕이 가장 세속적으로 표현된 것이 정치적 야망이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할 것인가”하는 남이(南怡)의 시 구절은 정치적 야망으로 인생을 규정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조선조에서 도덕적 이상은 정치참여의 명분이었지만, 벼슬은 그 자체로 많은 학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목표였다. “동문에 출세한 사람도 많은데, /나 홀로 춥고 가난한 가운데 떨어져 /나이 서른에 관직도 없는 나그네로, /동서를 헤매는 사람”-이규보(李奎報)는 유교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관직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쓴 일이 있다. 이러한 정치적 야망은 조선에서 벼슬 욕심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크고 작은 야망은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정치참여의 위험 요소를 나타낸다. 물론 이 위험은 다른 긍정적 업적을 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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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야망을 떠나서도,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불투명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을 말한다. 현실 참여는 현실의 논리에 가담하고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정복하기 위해서 복종한다”는 말로 간략하게 설명한 일이 있지만, 이것은 사회를 정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을 개조하려는 이상은 알게 모르게 현실에 휘말린다.
역사에서 우리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정치가 가장 권모술수의 활용을 서슴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권화가 되는 것을 본다.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상은 현실과 대결하면서 그 스스로 이상 실현을 가장 천박하고 야만적인 전술을 위한 구실로 삼을 수 있다. 현실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정치에 의한 간섭이 될 가능성이 많다. 중국의 유학과 정치의 역사에서 “정치를 인간화하려 한 유학자들의 의도”는 “도덕적 상징들을 정치화하여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편리하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어떤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상주의적 전통의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경계한다고 하여도, 지식과 정치의 결합에는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다. 사회 현실에 작용하려면, 그것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개입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을 체계화하는 데 능한 것이 지식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의 힘을 넘어가는 독자적인 힘과 무게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진상으로부터 괴리된 아이디어의 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자신의 사회이론은 삶의 현실에 기초한 과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만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데올로기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 없는 패러독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진실 허무주의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대하여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의 옹호로서 또 정치혁명의 수단으로서 효과를 발휘한다. 근대 세계사에서나, 우리 역사에서나 정치혁명은 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조 전체를 한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부정의 관점은 긍정의 관점보다도 더 쉽게 전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구조의 긍정적 효과들은 작은 것들이 총계로서만 파악되는 데 대하여 부정적 측면은 쉽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연결된다.
사회의 복합성은 부정에 의하여 단순화된다. 이것은 삶이 끝없는 세말사인 데 대하여 죽음은 하나의 사건인 점에 유사하다. 혁명적 전복의 시기에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덕도 정의(正義) 하나로 단순화된다. (정의는 다른 덕성에 비하여, 가령 인(仁)에 비하여 부정의 덕성이다.) 부정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역사적 과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만 그리고 파괴의 작업에만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
노무현 정부의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정부를 움직여 온 것은 일정한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전의 민주혁명의 이념들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추상화된, 그러니까 더욱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해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도 혁명적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약화됨에 따라 그만큼 현실 충격의 힘이 줄어들게 된 결과일 것이다.
거대 계획 중심의 정책 발상, 파당성을 강조하는 언어와 인사 정책, 움직이는 현재보다도 과거에 주의를 응고시킨 과거사 바로잡기 등-이 정부의 정책 발상들은 그 사고의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깊이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문제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합리적 사고력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빈부격차나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 계속되는 자가당착적인 정책들은 현실에 즉하여 그리고 긴 숨결로 끈질기게 사고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하나, 현실참여의 과실에는 궁극적 불확실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회현실은 간단한 이념의 도면에 따라 또는 몇 개의 손잡이로 움직여지는 기계가 아니라 무수한 자유변수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그것은 근년의 과학에서 말하는 바, 단선적 사고로 포착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성적 연산(演算)을 넘어가는 것은 아닌, 복합체계에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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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하나로 있으면서 현실의 복합성에 조응하여 변화하는 유연한 이성에 이르려는 노력이다. 그에 이어진 도덕적 이상도 좁은 투쟁적 목표를 넘어 넓은 인간성 실현을 위한 윤리적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 이상은 종종 우리의 원한(ressentiment)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이성의 사실적, 도덕적 명증성은 끊임없는 자기정화의 과정을 통하여서-야망으로부터, 사적인 정열로부터, 마키아벨리즘의 유혹으로부터, 또 독선과 오만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함으로써만 근접된다. 이 명증성을 위한 노력은 지식인의 제1차적인 의무이지만, 지식인의 국가와 사회를 위한 봉사의 본령도 여기에 있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