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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
- 패니 브리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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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14-10-30
: 1,057
[제인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
청소년용 그래픽노블
이라고 하는데 만화책 같기도하고 긴그림책같기도하고 단편성장소설에 삽화를 많이 그려놓은것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그림의 역할을 생각할 때,
나에겐
그냥 그림책으로 읽힌다.
읽는 내내
한 아이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주로 아이들과 사는 사람인지라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많이 만나게 된다.
따돌림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나이 관계없이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때 늘 일어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따돌림은 특별한 흠이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뒤집어서,
흠이 많으면 따돌림을 받아도 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또 뒤집어서,
매우 마음모진 사람들만 따돌림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한번 더 뒤집으면,
마음 따뜻한 사람은 절대로 따돌림같은 악한 짓은 안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유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쨌든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괴로워하는 아이가 여기 있다.
아픔은 대개 잘 전해지지 않는다.
나의 아픔을 누군가 알아주는 일,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서도, 당연히 학교에서도.
누군가 그런 행운을 잡으면,
어지간한 따돌림에서는 돌이켜 살아난다.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세상이든 학교든
사람사는 곳에서는
방관자가 많은 법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따로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방관자가 저기서는 적극적인 개입을 한다.
여기서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자가 저기서는 팔짱을 낀다.
'나는 회의하는 자이다.
나는 세상도 사람도 믿지않는 자이다.
목감기 코감기에 시달려 자정도 되기전에
몸을 눕혔다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악몽에 퍼뜩 눈을 떴는데 새벽이다.
다시 잠들까하다가 엊그제 구해온 그림책 하나를 폈다.
어제 읽고 사진 몇장만 찍어놓은.'
《제인에어와 여우와 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이에 고요히 흐르는 힘이 있어 좋았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과 삶과 사랑...
회의하는 자에게도 삶은 사랑이다.
여전히.
그리고 그 때에라야
삶은 바램이고
삶은 믿음일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좋은 말 참 많은 Bible에서도
특별히 참 좋은 대목이다.)
아..
이런 표현, 처음 보았다.
새장같은 갈비뼈에 또 구멍이 뻥 뚫린다....
라니......
아이는 가슴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책을 펼친다.
드디어 세상은 색깔을, 빛깔을 되찾는다.
이해된다.
저 아이의 눈 아래에 (under) 서있는 (stand)
느낌이 든다.
눈을 들면
세상엔 어디에도 숨을 데가 없다...
숨을 데가 없는 아이를 작가는 다리만 그려놓았다...
지워져버린 아이...
아이는 이 책을 지금까지 자기가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라 생각한다...
《제인 에어》
누렇게 탄 죽과 거무스름한 스튜만 먹으며 지내는 제인에어에게서
아이는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고
그 제인에어가 영리하고 날씬하며 지혜로운 여인으로 자라는 것을 보며
한 줄기 빛을 보았을 것이다.
책이 전해주는 위로...
책이 비춰주는 희망...
세상으로부터 따돌려진 아이...
그 애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이 세상 어디에나 산재해 있듯이...
아이(헬레네)가
악몽같은 따돌림으로부터
제인에어와 [ 즉, 책 또는 고전 ]
제랄딘 [ 즉, 친구 또는 사랑 또는 호의를 가진 타인 ] 을 힘입어
서서히 서서히 일어난다.
화이팅!
이 그림책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골몰히 생각하게되는, 또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그런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요전날 올린 [이럴 수 있는거야] 도
'이럴수있는거야'와 '참좋았어요' 사이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호의가 있다.
그것이 힘이 된다.
아마 박노해 시인이 엊그제 보내온 《보리수마음》도
사람이 있으니,
사람에게 보내는 사랑이 있으니,
동시에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으니,
그 잎새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둥치의 서원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리라.
다, 사람이다!
**
헬레네가 제랄딘을 만나는 장면을 올리려고 사진과 글을 한참 썼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날아갔다... -_-
다시 쓰기... ㅜ ㅜ
헬레네가 빠져있는 구멍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림은 얼마나 힘이 센가...
긴장한 헬레네를 묘사한 장면.
온몸이 푹 파묻힐만큼 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의 마음...
아... "나는 소시지다."...
수렁에 빠지면, 누구나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소시지다. 나는 장의사 소시지다. 나는 그저 고작 소시지일 뿐이다..."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세상의 종말을 꿈꾸는
그 마지막 절망의 순간...
바로 그 때...
그 찰나의 순간...
바로 그 절망의 공간에서 만나는 빛...
걱정스러운 얼굴.
적확하다.
나의 불행을, 나의 고통을,
아무 말없이
그냥 걱정해주는 눈빛 하나로도 세상은 구원될 수 있다...
헬레네에게 빠알간 여우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결국 빨간 여우는 헬레네,
누군가의 공감,
누군가의 호의,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실감.
한 줄기 빛...
여우가 달아나버리지 않기를...
여우가 여기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여우가 우리 텐트를 지켜주기를...
스핑크스처럼,
보디 가드처럼,
한 마리 용처럼...
이 장면......
늘 잿빛이던 세상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이제 다른 아이들의 놀림은
내게 관여할 바 없는 스치는 바람입니다.
자존감은 외부와 단절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듯 합니다.
어떤 환경과도 무관하게 자존감을 갖게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정신분석세미나에서 들었던 말...
" 아이들에게 《아버지》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어머니가 존경하는 남자사람"일 때에만 정상적인 역할을 합니다. "
ㅡ 이 세상에 아버지가 그렇게도 드문 이유가 그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그 때 했습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자리했던 남자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여자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종류가 달랐습니다.
누군가 (정상적인 역할을 해주는) 타인이 있어야만 세워지는 자존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교사가 세워주어야만, 교사는 아이들이 세워주어야만,
아이들은 부모가 세워주어야만, 부모는 아이들이 세워주어야만,
누군가 관계하는 상대가 세워주어야만 세워지는 그런 역할의 자존이 있다는 것...
자신의 노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그런 지점이 꼭 있다는 것...
친구 제랄딘이 있어서 이제 아이는 빛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갑니다...
여우는,
저 빠알간 여우는
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우호감 ㅡ 적대감의 반대로서 ㅡ 의 상징일 것입니다.
이제 아이에게는,
셋이 존재합니다.
현실적 세계에서의 벗 제랄딘.
문학적 세계에서의 벗 제인에어.
심리적/상상적 세계에서의 벗 빠알간 여우..
참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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