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집 안은 젖은 장화를 말릴 때 나는 겨울 냄새와 계피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엄마가 호박 파이와 생강빵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P23
나는 뺄셈에 대해 물어 보려고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쳐 온통 황금색을 이루어 놓았고, 그녀의 곱슬거리는 금발은 이마 옆으로 드리워져 양쪽 어깨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잠시 동안 그녀는 보스턴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 준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와 있던 사진과 똑같아 보였다. 거의 소름끼칠 정도였다.
그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 몰리가 혀를 쏙 내밀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그냥 몰리가 되었고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P30
몇 가지 기억은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이 좋다. 특히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잊을 수 있을 만큼 나이 먹지 못했을 때 말이다.- P55
실제로는 몰리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몰리는 2월 내내 독감에 걸려 있었다. 휴지를 통째로 옆에 놓고 늘 그 곳에 앉아 지내다시피 하는 몰리는 마치 집 안 장식품이나 가구처럼 여겨졌다.- P58
그는 한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카메라에 대해 얘기했었다. 만일 다락방에서 찾을 수 있다면 자기는 아직도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독일에서 그 카메라를 샀다고 했는데 당시 그는그 곳에 주둔해 있던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군대에 계셨어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군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대학에서 낙제해 퇴학당하고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는 청년들뿐이었다.
가끔 그들은 도시의 우리 집으로 아빠를 만나러 오곤했다. 머리를 이상하게 깎은 모습들이었다.
월은 껄껄 웃었다.
"나는 장교였단다. 믿기 어렵지? 사람들이 나한테 경례를 했었지."
그가 말했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손을 들어올려 경례를 했다. 사진에 그 모습이 나와 있었다.- P68
"너한테 저런 식의 감정을 느낀 사람이랑 결혼한다면 근사하지 않겠니? 네 생각만 하면 언제든지 저렇게 미소짓는 남자 말이야."- P71
"메그, 너도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예뻐질 거야. 그리고 예쁘고 안 예쁜 것 때문에 차이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봐. 특히 너한테는 말야. 네가 가진 그 많은 재능을 생각해 보라구. 또 머리도 좋잖니. 나는 정말 멍청하잖아. 사실 곱슬머리랑 긴 속눈썹을 빼놓으면 내가 가진게 뭐 있니?"- P75
왜 저러신다지? 양상추 먹고 싶니라니!
두 달 전만 해도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직접 갖다 드시지, 아가씨."
나한테는 아직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몰리는 샌드위치를 다 먹지도 않았다. 그녀는식탁으로 와서 두 입쯤 베어 먹고 안락 의자로 훌쩍 돌아갔다. 그리고는 배가 부르다고 말했다.
"너 정말 괜찮은 거니, 얘야?"
엄마가 물었다.
"나를 그만 좀 내버려 둬요. 네?"
몰리는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우리 방으로 뛰어올라가서 문을 쾅 닫았다.
문은 다시 벌컥 열렸다. 그녀는 식식거리느라 우리 방의 문이 완전히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것이다. 그런 다음 몰리는 오후 내내 낮잠을 잤다.
전에 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러는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내 자신을 미워했다.
그런데 지금 몰리가 그 꼴이고, 나는 어쩌다 그녀를 미워하고 있다. 아니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 그녀를 달라지게 한 일을 미워하고 있나 보다.- P107
"이봐, 메그. 나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꾸밀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나쁜 일이 가끔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고 또 인정하면 세상살이가 훨씬 쉬워지지. 물론 아기는 틀림없이 건강할 거야. 하지만 마리아와 나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얘기한단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야."- P148
"네 꿈은 현실 세계에서 오는 거야. 그 꿈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좀 도움이 될 거다.
네가 바라지 않더라도 너와 몰리는 헤어지게 될 거라는 뜻이야. 왜 인생은 때때로 너무 일찍 끝나는지 알고 싶겠지만 아무도 그 대답을 해 줄 수 없단다."
나는 손으로 민들레 줄기를 똑 끊었다.- P169
적과 마주하기 전에 적의 정체를 알면 좋다고, 윌이 언젠가 나에게 말했었다.
아빠는 한숨을 쉬었다.
"급성 골수 백혈병이라고 하더라."
"그걸 빨리 세 번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아빠에게 가시 돋친 말투로 물었다.
"메그, 나는 그걸 한 번도 제대로 말할 수 없어.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내 가슴이 찢어진다."
아빠는 나를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너무 꼭 안았기 때문에 아빠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P172
엄마는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너는 아주 진지하고 엄숙하게 몸을 일으켜서 혼자 풀밭을 걸어가려고 애를 썼지. 넌 자꾸 넘어졌지만 여간해서 울지도, 웃지도 않았어.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해낼까 생각하고 다시 도전할 때 네 미간에는 주름이 잔뜩 잡혔어."
"나는 아빠를 닮았군요."
엄마는 미소지었다.
"그래, 닮았어, 메그."
"그런데 몰리는 엄마를 더 닮았어요. 그게 살아가는 데 더 편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어요."
내가 말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고 그 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글쎄,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그게 더 편하지. 그냥 웃어 넘기면 되니까. 인생을 아주 쉽게 만들어 주긴 해. 재미있게도."
엄마는 손으로 조각이불을 다독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야, 크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몰리와 나 같은 사람은 준비가 돼 있질 않아. 우리는 웃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웃을 수가 없는 때가 닥치면 우리는 무척 힘이 들어."- P174
돌투성이인 고르지 않은 들길을 걷는 것은 그에게는 나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받아들이는 데 대해 언젠가 벤이 한 말을 나는 그 때 이해했다. 그를 지켜 보면서 윌도 언젠가는 나에게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P213
그 어딘가에서, 몰리에게는 계절이 언제나 여름일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