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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film의 서재
  • XX
  • 앤젤라 채드윅
  • 13,500원 (10%750)
  • 2019-03-06
  • : 456

"우리가 아이를 갖는 데 이제 남자는 필요 없어."

근래에 읽은 페미니즘 관련 책들 중에서 이렇게 속시원한(한편으로는 도전적인) 문장이 있었나 싶다.

 

대형 서점의 도서 분류 코드에도 SF/과학소설로 분류되어 있고, 난자와 난자의 결합만으로 임신이 가능해진다는 설정 자체가 크나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SF/과학소설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은 이후에는 이만한 페미니즘 소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성들과 성소수자가 겪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느꼈다.

 

다시 로지 생각을 한다. 내가 마침내 아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눈에서 반짝이던 불꽃을 기억한다.

로지는 훌륭한 엄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 아이도 될 것이다.

내 아이가 로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것이다.

정자 기증자, 크레타섬을 떠난 이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존재의 악몽은 결국 사라질 수 있게 되었다. 
-p.22

 

 

줄스가 로지의 반짝이던 불꽃을 발견했던 그 순간의 느낌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아이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 그들이 그려나갈 행복한 가정의 모습.

그렇게 레즈비언 커플인 줄스와 로지는 세계 최초의 '난자 대 난자' 인공수정 임상시술에 참여하게 된다.

 

기자로 일하고 있어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줄스는 자원 사실을 철저히 숨기지만 개인정보가 유출되고, 둘은 그날부터 언론과 대중의 과도한 관심과 비난, 협박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이를 갖는 것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 거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벌어지는 행태들이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개인의 인권까지 침해하며 보도 경쟁에 열을 올리는 언론의 행태, 전문가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짜 뉴스(카더라)의 범람, 각종 SNS를 통해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은 물론이며.

소설에서는 거기에 더해 보수적 종교 단체의 조직적 반대 운동과 남성우월주의자들의 분노 표출과 이 사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정치인의 등장까지 하나이 사회에서 동성애자라 참아내야만 하는 일들과 직장에서 겪는 성차별 등 현대 여성의 삶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결합에 따른 자연 임신은, 난자가 어떤 정자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아기의 성별이 결정되죠.

하지만 난자에는 X 성염색체만 들어 있기 때문에, 난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경우에는 여자아이밖에 태어날 수 없어요.”
그러자 진행자가 눈빛을 반짝, 하며 장난기 섞인 심술궂은 말투를 쓴다.
“그럼 이론적으로는 우리 남성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멸종할 수 있겠군요?”
교수가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눈까지 웃지는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p.9

 

 

이 부분에서 흔히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결국엔 그들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고상한 윤리나 도덕의 뒤에 숨어 지금껏 휘둘러 온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은 소망.

그러기 위해선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 받아야만 하는 성소수자들.

로지와 줄스 두 사람의 사랑과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

나의 입장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들을 응원하는 입장에 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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