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서두에서 저자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썼다고 밝혔었는데,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그러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듯하다. 잠이라는 꿈(비현실)의 세계에서 잠에서 깬 이후의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인데 주저리주저리 말들이 많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나의 인생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소설의 극초반부라 뒤에 어떤 내용들이 나올지 감을 잡을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잠에서 깬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입 밖에 내어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라고.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물음이다. 물을 것까지도 없이 대답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여기는 나의 인생이다. 나의 생활, ‘나‘라고 하는 현실 존재의 부속물. 특별히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도 어느 틈엔가 나의 속성으로서 존재하게 된 몇 가지 사항 · 사물 · 상황.- P12
나는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P12
창녀들에게 이름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P18
어째서 누군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P19
돌고래 호텔로 돌아가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와 다시 한번 대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P20
그렇다, 나는 이 근래 사 년 동안, 그 냉랭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떨어내 버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돌고래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 년 동안 조용히, 부지런히 모아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없애 버리는 것이다.- P20
물론 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을 손에 넣었던 건 아니다. 그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같은 잡동사니를 그럴싸하게 짜 맞추어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고, 내 나름의 조그마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구축해 왔다.- P20
다시 한번 본래의 텅 빈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것인가? 창문을 열고 무엇이든 내동댕이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P20
단념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단념하자, 무슨 생각을 하건소용없다. 그것은 너의 능력 밖의 일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확실히.- P20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녹음된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자아의 상像은 왜곡된 채 인식되어 모양 좋게 바뀌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P21
우리는 모두가 가공의 세계에서 가공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다.- P22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첫걸음이다. 바른지 그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이야기 해야 할 때다. 그리하여 나도 해야 할 말을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2
사람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할 때 (추구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인생은 좀 더 많은 데이터를 그에게 요구한다. 명확한 도형을 그리기위한, 더 많은 정보가 요구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아무런 회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P22
지껄이자.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되도록 길게. 바른지 그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P23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보든,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그것은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문제인 것이다.- P29
‘실제 이상으로‘라는 표현은,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像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하다.- P29
세상에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P30
나 자신이 그 쓸쓸함을 제법 잘 견뎌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P33
네가 네 자신을 마멸시켜 온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너는 마멸된 것이다,- P33
나는 일의 좋고 싫음을 가릴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도대체가 나에게 맡겨지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좋고 싫고를 가릴 만한 차이가 없었다.- P34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반적으로 세상사란 것은 끝으로 가면 갈수록, 그 질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주파수와 마찬가지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 버리면, 인접하는 두 음향 중 어느 쪽이 높은가 하는 것 따위는 거의 분간해 낼 수 없으며, 이윽고 분간은커녕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P34
쓰레기 치우기나 눈 치우기와 같은 일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다. 좋고 싫고와 관계없이.- P35
나는 다만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건에 관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ㅡ실제적으로ㅡ정리하고 검증하는 데 반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자폐적이 되거나, 외부 세계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였다. 다시 한번 자신을 제대로 회복하고, 재정비하기 위한 순수하게 물리적인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P37
자신을 재정비한다는 의미와 그다음의 방향성에 대해서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선 다시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우선 평형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먼저다.- P37
한 번 죽어 버리면, 그 이상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죽음의 훌륭한 점이다.- P40
하지만 나는 곧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그뿐이다.- P41
모두 고만고만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았다. 언제든 언제든 언제든, 사물의 존재양식은 같다. 다만 연호年號가 바뀌고, 사람이 교체된 정도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 없는 일회용 음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어김없이 존재할 것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처럼.- P42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P43
‘난 태어나고부터 줄곧 잃어버리기만 했어‘- P43
‘그리고 난 지금 그대를 잃어버리려고 해.‘- P43
이따금 그럴 때가 있다. 무엇인가 하찮은 일이 내 마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다.- P43
이 거대한 개미집 같은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찾는 것은 그다지 곤란한 작업이 아니다. 물론 그 일의 종류며 내용에 대해서 군소리만 않는다면 말이다.- P45
나는 일감의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았고, 들어오는 일감은 닥치는 대로 떠맡았다.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글씨도 깨끗했다. 일솜씨도 꼼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당히 할 일도 성실하게 했고, 대가가 낮아도 싫은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P46
눈을 치우는 작업과 같았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길가로 치웠다. 한 조각의 야심도 없었고, 한 조각의 희망도 없었다. 오는 일거리를 닥치는 대로 거침없이 체계적으로 처리해 나갈 따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인생의 낭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이만큼 낭비되고 있으니, 내 인생이 낭비됐다 해도 군소리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P47
우리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선 낭비가 최대의 미덕이다. 정치가는 그것을 내수內需의 세련화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낭비라고 부른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하지만 비록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도,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글라데시나 수단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방글라데시에도 수단에도 별다른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일을 계속했다.- P47
내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로선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자기 훈련. 얼마 동안 일을 시키지 않았던 손가락과 머리에 실제적인ㅡ그리고 되도록이면 무의미한ㅡ일을 시키며 혹사하는 것.- P48
나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모두 하나둘씩 떠나가 버리고, 나만이 연장된 유예기간 속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인생.- P50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그녀를 원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P51
그렇다, 결국은 그녀 옆에 있으면서 나는 달 위에 있었던 것이다. 옆구리로 그녀의 가슴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내가 진심으로 찾고 있었던 것은 다른 그 무엇이었다.- P51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 무엇을 하면 좋은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론은 훨씬 전부터 짙은 구름처럼 내 머리 위에 빠끔하게 떠 있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결심을 할 수 없어서, 하루 또 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돌고래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P51
키키가 출발점의 열쇠를 쥐고 있다.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이 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나가 버린 자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이 방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해보는 수밖엔 없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P52
솔직히 말해서, 이런 종류의 취재를 나처럼 꼼꼼하게 하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하자면 참으로 힘든 일이고, 대충하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제대로 하건, 수고를 덜 하려 하건, 기사로서의 완성도에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르다.- P56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왕 하게 된 바에야 제대로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로다.- P57
실제로 가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가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달리 특별히 이렇다 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P59
나는 낭비라는 건,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대 미덕이라고 그에게 가르쳐 줬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팬텀 제트기를 사들여 스크램블로 쓸데없이 연료를 소비함으로써, 세계의 경제가 그 몫만큼 더 순환되고, 그 순환에 의해 자본주의는 한층 더 고도화되어 가는 것이다. 만일 모두가 낭비라는 것을 일절 하지 않는다면, 대공황이 일어나서 세계의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것이다. 낭비라는 것은 모순을 일으키는 연료며, 모순이 경제를 활성화하고, 활성화가 다시 낭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라고.- P60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파악,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양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P61
하코다테역 근처 서점에서 산 잭 런던 Jack London의 전기를 읽었다. 잭 런던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비하면, 내 인생 같은 건 떡갈나무 꼭대기에 난 홈에서 호두를 베개 삼아 꾸벅꾸벅 졸면서 봄을 기다리는 다람쥐처럼 평온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전기傳記란 것은 그런 것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평화로이 무사안일하게 살다가 죽어 간 가와자키 시립 도서관원의 전기 따위를 읽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대상행위代償行爲를 찾고 있는 것이다.- P61
닮았다ㅡ하지만 다르다. 마치 다른 행성과도 같다. 언어도 복장도 표정도 모두 같지만,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다른 별개의 행성. 어떤 종류의 기능이 통용되지 않는 별개의 행성ㅡ하지만 어떤 기능이 통용되고 어떤 기능이 통용되지 않는가는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P63
내가 고독하다는 것ㅡ이것은 진실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나의 문제다. 나는 나를 되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P64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라면ㅡ그리고 그 돈이 언젠가 되돌아온다는 확신이 있으면ㅡ그들은 거기에 얼마든지 돈을 쏟아붓는다.- 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