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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드디어 이 작품을 읽어본다. 개인적으로 그간 저자가 쓴 책들을 소설이든 에세이든 가릴 것없이 이것저것 마구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자가 썼던 작품들의 출간 순서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어서 가급적 그 흐름에 맞춰 읽어보려 하고 있다.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서문에 나온 글의 일부인데, 이것 외에도 이 책의 앞표지와 뒷표지 그리고 앞 뒤 책날개에 간략하게나마 나온 글들을 통해 본문에서 어떤 내용들이 다뤄질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대략 이런저런 사랑 얘기들과 더불어 거기서 파생된 어떤 것들을 통해 독자들이 생각해볼만한 여러가지 교훈적인 메시지들을 던져 주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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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다가 중간쯤에 등장하는 나가사와 선배라는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매력있게 느껴졌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후배에게 왠지모르게 의미있는 말들을 많이 해줬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의 핵심은 주인공과 그 주변을 맴도는 인물들 간의 썸씽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와 나가사와 선배 간의 관계도 한 번쯤 주목해서 볼만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P8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P8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北海의 상공에 뜬 검은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까지의 인생 과정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떠나버린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추억들.- P14
"Auf Wiedersehen!" (안녕!)- P14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보지 않고서는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P17
"언젠가는 끝나. 끝날 때 우린 다시 한 번 생각을 바꾸면 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P20
"우린 손익 계산서를 보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니잖아. 만약 네가 나를 지금 당장 필요로 하면 나를 이용하면 되는 거야. 안 그래?"- P20
"어깨에서 힘을 빼면 훨씬 몸이 가벼워지게 돼."- P20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이든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 하지만 만약 시간만 있다면 나는 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P21
이젠 알게 됐다. 결국 따지고 보면ㅡ하고 나는 생각한다ㅡ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P23
일상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그리 대단한 차이가 있는 건 아닌 것이다.- P27
정말이지 세상엔 여러 가지 희망이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구나,- P31
"그래. 다들 나를 가냘픈 여자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사람은 겉보기와는 다른 거야."- P39
"요즈음 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 뭔가를 말하려 해도 늘 빗나가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야. 말이 빗나가거나 아니면 전혀 반대가 되기도 해. 그래서 그걸 정정하려면 더 큰 혼란에 빠져서 빗나가버리고, 그렇게 되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한복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 있어서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딱 알맞은 말은 늘 또 다른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그걸 따라잡을 수 없는 거야."- P40
"모두가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니까 초조해하지."- P40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정할 수가 없었다.- P45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ㅡ그것뿐이었다.- P45
처음 한동안은 그렇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P46
우리는 그것(죽음)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P46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P46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 P47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온기인 것이다.- P52
그(나가사와)는 나 따위는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밖에는 믿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문학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인생은 짧아."- P55
"나가사와 선배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나요?" 내가 물어봤다.
"발자크, 단테, 조셉 콘래드, 디킨스." 하고 그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렇게 현대적 성향이 있는 작가라곤 할 수 없겠네요."
"그러니까 읽는 거야.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걸 읽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밖엔 못하게 돼. 그런 건 촌놈,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부끄러운 짓은 안 하지. 알고 있나. 와타나베? 이 기숙사에서 조금이라도 멀쩡한 사람은 나와 너뿐이야. 나머지는 죄다 휴지조각 같은 것들이지."- P56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다녀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피곤하고, 자신이 싫어질 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P61
"왜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것(《도박사》를 두고 하는 말임ㅡ옮긴이)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그건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야. 알겠어?"- P61
"날이 저문다, 여자아이가 거리에 나와 주변을 어정거리면서 술을 홀짝거리고 있다. 그녀들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나는 그 무엇인가를 그녀들에게 줄 수 있는 거지. 그건 정말 간단한 일이야.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일이지.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뜨릴 수 있고, 상대방도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것이 가능성이라는 거지. 그런 가능성이 눈앞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그저 보고만 지나칠 셈인가?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장소가 있는데, 넌 잠자코 지나치겠단 말이야?"- P61
"네가 이런 걸 공허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증거고, 그건 아주 바람직한 일이야."- P61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지 말았으면 해.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해도, 또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P74
네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 건 아니야. 나에게 상처를 준 건 나 자신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P74
나는 그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어딘가로 가져갈 수도, 어딘가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하는 말이 전혀 내 귀에는 와 닿지 않았다.- P75
나와 텔레비전 사이를 가로지르는 막막한 공간을 둘로 나누고, 그 갈라진 공간을 또 둘로 나눴다. 그리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일을 계속해,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P75
그런 졸렬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 하나에도 큰소리를 내거나 움츠러들거나 하는 것이다. 이봐, 기즈키, 여긴 형편없는 세계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놈들이 버젓이 대학에서 학점을 따고, 사회에 나가 부지런히 졸렬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P80
‘아니오, 신께서도 불행한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으신답니다.‘- P83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P86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면 어때?"- P87
"천만에. 대개는 얼간이들이지. 얼간이 아니면 변절자들이야. 관료 나부랭이나 되려는 인간의 95퍼센트 정도는 쓰레기거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놈들은 글자조차 똑바로 읽지 못한다구."- P90
"제일 큰 이유는 내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거야. 어차피 테스트한다면 제일 커다란 그릇 속에서 테스트해보고 싶다, 이거지. 말하자면 국가 말이야. 이 덩치만 커다란 관료 기구 속에서 어디까지 내가 올라갈 수 있는가, 어디까지 내가 힘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걸 시험해보고 싶은 거야."- P90
"그렇지, 게임 같은 거야. 나에겐 권력욕이랄까 금전욕이랄까, 그런 건 거의 없어, 정말이야, 난 하찮은 고집스런 남자일지 모르지만, 그런 욕심은 놀랄 만큼 없는 놈이야. 이를테면 무사무욕無私無慾, 그런 인간이거든. 다만 호기심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넓고 거친 세계에서 나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지."- P90
"그럼 이상이랄까, 그런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말인가요?"
"물론 없지" 하고 그는 말했다. "인생에 그런 건 필요 없어. 필요한 건 이상이 아니라 바로 행동 규범이야."- P90
"이봐, 와타나베." 하고 식사가 끝나자 나가사와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나와 너는 여기를 나가 십 년이나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것만 같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련을 가질 것만 같고"
"꼭 디킨스의 소설 같은 이야기군요." 하고 말하곤 나는 웃었다.
"그렇군." 하고 그도 웃었다. "하지만 내 예감은 잘 맞는단 말이야."- P91
"신사여야 한다는 거야."- P91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P92
데우스엑스마키나(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 같은 것을 이용해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단숨에 해결하는 수법-옮긴이)- P93
에우리피데스에 나오는 신이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P93
이 녀석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94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남아도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한가해?"
"내 시간을 조금 줘서, 그동안 너를 잠자게 해주고 싶을 정도야."- P95
"친절한 게 아니고, 단순히 한가한 거야."- P95
미도리는 요쓰야 역에서 잠시 걸어가면 있는, 그녀의 고등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쓰야 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문득 나오코와의 그 끝없는 산책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이 장소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 오월의 일요일에 주오센 전철 안에서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아니다, 만약 그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똑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때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난 것이고, 만약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도 어딘가에서 만났을 것이다.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P96
"한 번도 쉬지 않았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한 번 지고 나면 끝장이란 생각. 한 번 지고 나면 그대로 질질 끌려가게 되지 않나 싶어서 겁이 났던 거야."-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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