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소설의 서두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꿨을뿐 그 밖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스턴에 살던 시절 한 건축가와 알고 지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케이시이고 그와 함께 거주하는 제레미라는 사람은 피아노 조율사라고 한다. 케이시의 아버지는 과거 열렬한 재즈 팬이었던지라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다수 소장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부모를 여읜 케이시는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소유했던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재즈를 좋아하는 저자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시는 출장으로 인해 집을 비우게 되었고 때마침 함께 있던 제레미 역시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본가로 돌아가게 되면서 케이시의 집은 부재중이 된다. 근데 케이시의 집에는 마일스라는 개가 있어서 개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케이시는 저자에게 자기 집을 봐주면서 좋아하는 재즈 음악도 마음껏 들으라고 말한다. 저자도 때마침 여러 상황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케이시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다.
이렇게 저자는 케이시의 집에 마일스(개)와 단 둘이 있게 되는데, 아래쪽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린다. ‘렉싱턴의 유령‘ 이야기는 누군가가 아래층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뭔가 긴장감이 조금씩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디로부터도 들어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P28
"나는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난 상태 속에 있었어. 다만 이번엔 아버지의 잠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었지."- P38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아버지와 난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어. 그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아버지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끝없는 잠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어. 마치 혈통을 잇는 특별한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이야."- P38
"나는 자고 자고 자고...... 시간이 썩어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잤어. 얼마든지 끝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란 거야. 그때의 나에겐 잠의 세계가 진짜 세계고, 현실 세계는 덧없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건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지.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아버지가 느끼셨을 심정을, 그때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거지."- P39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P39
무엇을 보든 이제 넌 아무 소용이 없어. 너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란 존재는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 거야. 그러자 짐승의 눈마저 허공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밤의 어둠만이 소리 없이 방 안에 가득 찼다.- P52
"내가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때리는 거나 맞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건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으면,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권투는ㅡ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ㅡ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오르면 때때로 나 자신이 깊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끔찍하게도 깊은 구덩이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볼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고독합니다. 하지만 슬프진 않습니다."- P61
"한마디로 고독이라고 말했지만 고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듯 쓰리고 아픈 고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고독도 있습니다. 그런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깎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그만큼 돌아옵니다. 그것이 내가 권투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P61
"잊어버리고 싶은 건 절대로 잊히지 않죠."- P61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일생에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지는 일 말이에요. 나는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런 상대가 있더군요.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경우, 상대방도 이쪽과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거죠."- P62
어떤 부류의 인간은 성장도 후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할 뿐이지요.- P72
처음에 때릴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꼴 한번 좋구나 하면서 엄청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점점 언짢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P84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말없이 참는 것뿐이었어요.- P85
‘정말 이 정도의 일로 사람은 의기양양해지거나 승리했다고 우쭐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정도의 일로 이 녀석은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녀석(아오키)은 아마도 진짜 기쁨이나 진짜 자존심 같은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저 조용한 떨림을, 이 녀석은 절대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을 거라고.- P88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음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한테 그 깊음이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깊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오키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공허하고, 변화가 없고 단조롭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목해준다고 한들, 아무리 겉으로 으스댄다고 한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P88
충분히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겐 아직 자부심이란 게 남아 있었거든요. 아오키 같은 인간에게 이대로 질질 끌려갈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P89
권투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상대방의 눈의 움직임에 민감해지죠. 아오키의 눈은 다리를 꼼짝할 수 없게 된 권투 선수의 눈 같았습니다.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거죠.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발은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깨를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펀치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런 눈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왜 그런지 본인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P89
인생 그 자체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 자신이 경멸하고 모멸하는 상대에게 간단히 짓눌려 찌부러질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지요.- P90
나는 틀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린 거다, 하고 자신을 계속 다독였지요.- P90
기회가 올 때까지 줄곧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낚아채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교묘하게 잡아쥐고 선동하는 능력ㅡ그런 건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런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능력이란 건 인정합니다.- P93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P94
"침묵이 차가운 물처럼 모든 것에 조금씩 스며들어갑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거고 저거고 모든 것이 질척하게 녹아버리고 말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속으로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