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해 기존의 곤고하던 지위가 흔들리는 집단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새로운 집단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선 본문에서 알파고 출현 이후 바둑업계에서 활약하는 프로기사들의 얘기들을 다양하게 들어볼 수 있었는데,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멘붕이 왔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업계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인공지능이라는 변화의 물결에 과감하게 올라타서 비주류였던 사람이 새로운 주류로 거듭나는 사례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업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이러한 지각변동은 분야를 막론하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인데, 이러한 지각변동이 어느정도 안정되어 땅이 평평해지게 되면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식으로 기존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공평해진다는 말로 표현한 듯하다.
추가로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인공지능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용어라고 느껴졌다. 아마도 민주화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듯하다.
‘평평해짐‘은 곧 ‘공평해짐‘을 의미한다.- P106
일단 나오면 그게 없었던 시절로 세상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 ...(중략)... 경쟁에서 유리해지는 그룹이 그걸 포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P106
인공지능처럼 쓸모 있고 강력한 기술은 마치 야수와 같다. 일단 거리에 뛰쳐나오면 붙잡아 우리에 가두는 것이 매우 어렵다. ...(중략)... 사실상 그 야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아직 거리에 나오기 전뿐이라고 봐야 한다.- P107
챗GPT가 등장한 뒤로 ‘수준급의 실력을 지닌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나오면 당신도 이용할 거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그 질문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은 수준급의 소설 쓰는 인공지능을 쓰는 일을 내가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전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괜찮은 인공지능이 나와서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하면, 내게 선택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걸 써야만 한다.- P107
개발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AI-환경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할지 예측할 수 없다.- P110
인공지능은 스마트폰이나 소셜미디어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아니, 이 말은 부정확하다. 인공지능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집어삼킬 것이다. 인공지능은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뒤에 나올 다른 여러 기기, 그리고 소셜미디어와 그 뒤에 나올 다른 여러 미디어와 결합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 무언가는 사실상 우리가 살아야 하는 환경 그 자체일 것이다.- P113
한국기원의 바둑용어 사전은 기풍(棋風)을 "바둑을 두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각 개인 특유의 방식이나 개성"이라고 설명한다.- P115
바둑에는 ‘류(流)‘라는 것이 있다. 기사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 바둑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_조훈현 9단 자서전- P117
"바둑에서 기풍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감정이 사라지고 이성만 남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_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P118
기풍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기사들이 자유로웠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어떤 기사가 두는 방식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가 없었고 두는 사람들은 그게 가능한 포석이라고 생각했던 거고요. 그리고 그게 솔직히 재미있기도 했죠.- P119
"기풍은 어떤 기사가 본인을 증명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그런 캐릭터나 퍼스낼리티라는 건 승부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도 해설을 하지만 저는 바둑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바둑이 아름답고 어떤 바둑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지요? 최선을 다한 바둑에는 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_이희성 9단- P120
"기풍이라는 건 포석에서 드러나는 부분도 좀 있지만,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기풍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인공지능이 도입되면서 바둑이 굉장히 복잡해졌어요. 예전에는 어떤 틀에 의해서, 돌의 모양을 중시했는데 요즘은 그런 틀이 무너졌고 난전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어렵고 두는 사람도 어려워지는 상황이죠."- P121
‘포석은 기풍이 아니다‘ _유창혁 9단- P121
"기풍이라는 건, 바둑에서 자기 성격이 나오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성격이 차분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있든 없든 차분하게 가는 거고, 성격이 전투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계속 적극적으로 가는 거고요. 그건 별로 바뀐 것 같지 않아요."- P121
"인공지능 1.0 시대는 AI 수법을 빨리빨리 받아들여서 이걸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시기입니다. 그러면 성적이 많이 올라갔죠. 이제 AI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간에 격차가 있다는건 모두 인정하고, 다들 AI를 씁니다. 그래서 최근에 2.0 시대가 열렸어요. 자신만의 생각과 AI 수법을 결합하는 시대예요. 예를 들어 어떤 기사가 생각하는 수가 AI 분석으로 이길 확률이 50퍼센트 아래라면 그건 포기해요. 하지만 이길 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인 수 중에서는 가장 수치가 높은 수를 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를 택하는 거예요. AI가 이길 확률이 63퍼센트, 58퍼센트,
51퍼센트, 47퍼센트인 수를 제시하면 47퍼센트인 수는 버리지만 51퍼센트인 수는 고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의 개성을 뽑아내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기풍이라는 게 은근히 있어요." _김만수 8단- P123
"어차피 따라 두는 사람은 따라 두고요, 자기 뜻대로 두는 사람은 본인이 두고 싶은 대로 둬요." _김지석 9단- P124
어떤 프로기사들에게 기풍은 그저 개성의 다른 말이다. 포석은 개성적일 수 있지만, 포석이 비슷해지더라도 한 기사의 개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바둑 한 판을 두는 과정에서 그의 성격과 개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P124
프로기사들의 추측이기는 하나, 인공지능의 ‘기풍‘은 아마도 그저 초기 설정에 달린 문제인 듯하다.- P125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AI들도 스타일이 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쉬운 예를 들자면 상대를 작은 차이로라도 확실하게 이기는 확률을 높이느냐, 아니면 큰 차이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대요. 그리고 크게 이기는 걸 목표로 설정한 AI일수록 사람하고 비슷하게 둔대요. 알파고는 최대한 안전하게 이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생각에 좀 유리하다 싶으면 인간 기사들이 보기에는 최선이 아닌 것 같은 수도 두는 거예요." _이하진 4단- P125
"인공지능이 두는 바둑에는 기풍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생각의 흐름으로 연결되어서 나오는 수가 아니니까요. 단순히 그때그때의 확률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거니까요."
_정두호 4단- P126
"기풍은 (경향성이 아니라) 초반 구상을 의미한다" _안성문 바둑전문기자- P126
"바둑이 중반에 들어가면 이미 그때는 오로지 최선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칼싸움 같은 거예요. 구상은 50수, 길게 보면 80수 안에 있는 거죠. 한 기사가 자기 스타일대로 초반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풍이 나오는 거죠. 중반에 들어가면 치고받을 때 선택의 문제는 있겠지만 그건 기풍이 아니에요." _안성문 바둑전문기자- P126
결국 바둑계에서 사용해 온 ‘기풍‘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의 특정한 현상에 대한 모호한 비유였다. 따지고 보면 ‘성격‘이나 ‘철학‘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인간은 그런 개념어와 비유에 기대어 세계를 파악한다. 언어는 도구다.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를 비로소 제대로 묻게 된다.-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