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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의 소제목은 ‘거울에 비치는 것, 거울에 비치지 않는 것‘ 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거울의 속성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면, 현실 세계에서 거울은 사물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동일하게 비춰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속성에 자신의 상상력을 한 스푼 더 얹어서 본문을 통해 현실에 있는 것과 현실에 없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 중에 양 사나이라는 다소 독특한 외형을 가진 캐릭터가 있는데, 이 양 사나이가 실제 현실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양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이 오버랩되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인 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일들이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비현실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명확한 답이 있다기보다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라고 던져준 숙제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 끄적여본 내용을 좀 더 일반화해서 얘기해보자면 거울 밖의 실제 내가 존재하는 세계와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세계는 물론 똑같은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겠지만 또 항상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보는 세계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 차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만약 내가 보는 거울이 완전히 투명하고 깨끗한 거울이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겠지만, 혹시라도 그 거울의 일부분이 오염되어 있다든가 아니면 그 거울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뒤틀려있는 경우라면 설령 거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은 100% 정확한 현실이 아닌 왜곡된 현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독자인 내가 이래저래 끄적여본 내용들이 전체 본문의 맥락에서 엄청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듯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게 해줬다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새 맥주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계단 앞을 지날 때 거울이 보였다. 또 한 사람의 나도 역시 맥주를 가지러 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덕 수프Duck Soup>의 그루초 막스와 하포 막스처럼.- P218
<덕 수프Duck Soup> : 레오 매커리 감독의 1930년작 코미디 영화. 똑같은 나이트가운에 산타 모자를 쓰고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나온 막스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며 거울을 보는 듯 연기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P218
내 뒤로 거실이 비치고 있었다. 내 뒤의 거실과 거울 속의 거실은 같은 거실이었다. 소파도 카펫도 시계도 그림도 책장도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다지 멋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거실이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아니, 뭔가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218
나는 냉장고에서 파란색 뢰벤브로이 캔을 꺼내 손에 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거울 속의 거실을 바라보고, 그리고 진짜 거실을 바라보았다. 양 사나이는 소파에 앉아서 여전히 멍하니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 양 사나이의 모습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양 사나이의 모습은 거울 속에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휑뎅그렁한 거실에 응접세트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거울 속의 세계에서 나는 외톨이였다. 등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P219
어둠 속에서 잠이 깨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눈을 뜨고 처음 얼마 동안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겹쳐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으로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런 인물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게 생각된다.- P223
나는 세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아내가 말했듯이 결국엔 모든 것을 잃어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상실해간다.- P223
방 안의 어둠과 눈을 감았을 때의 어둠은 어둠의 색이 조금 다르다.- P227
"양 박사는 내내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아무데도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아."- P228
"너는 이미 죽은 거지?"
쥐가 대답할 때까지 무서울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불과 몇 초였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래"라고 쥐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죽었어."- P232
"이제 만약은 없어. 너도 그건 알고 있을 거야. 안 그래?"- P234
"간단히 말하면, 나는 양을 삼킨 채로 죽은 거야"라고 쥐는 말했다. "양이 깊이 잠들길 기다렸다가 부엌의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맨 거지. 놈은 빠져나갈 여유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양은 완전히 나를 지배했을 테니까, 마지막 기회였지."- P235
"난 제대로 된 모습으로 너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내 기억과 나 자신의 나약함을 지닌 본래의 내 모습으로. 너에게 암호 비슷한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지. 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구원받았나?"
"구원받았지"라고 쥐는 조용히 대답했다.- P236
"요점은 나약하다는 거야"라고 쥐는 말했다. "모든 것은 거기서 비롯되고 있어. 너는 그 나약함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P236
"나약함이란 것은 몸속에서 썩어가는 거야. 마치 괴저병壞疽病처럼, 나는 십 대 중반부터 줄곧 그것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언제나 초조했지. 자신의 속에서 뭔가가 썩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느낀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너는 알겠어?"
- P237
괴저병 : 몸 조직의 일부가 썩어 기능을 상실하는 병. 괴사와 비슷함.- P236
"나약함은 유전병과 같지.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스스로 고칠 수 없는 거야. 어느 순간에 없어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점점 나빠져갈 뿐이지."
"무엇에 대한 나약함이라는 거지?"
"전부 다. 도덕적인 나약함, 의식의 나약함,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나약함."- P237
"그야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나약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어."
"일반론은 그만두자.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물론 인간은 누구나 나약해. 그러나 진정한 나약함은 진정한 강인함과 마찬가지로 드문 법이야. 끊임없이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나약함을 너는 모를 거야. 그리고 그런 것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거야. 모든 것을 일반론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어."- P237
"더 이상 타락해가는 내 모습을 남들 앞에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어. 너도 포함해서 말이야. 혼자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면 적어도 남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거든."- P238
"결국은 내가 양의 그림자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도 그 나약함 때문이야.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었어. 아마 그때 네가 금방 와줬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야. 결심하고 산을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나는 틀림없이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갔을 테니까. 나약함이란 것은 그런 거야."- P238
"양이 네게 무엇을 요구했지?"
"모든 것.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요구했어. 나의 몸, 나의 기억, 나의 나약함, 나의 모순・・・・・・ 양은 그런 것들을 아주 좋아하거든. 놈은 촉수를 잔뜩 가지고 있어서 말이지, 내 귓구멍이나 콧구멍에 그걸 쑤셔 넣고 빨대로 빨아들이듯이 쥐어짜내는 거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지 않아?"
"그 대가는?"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지. 하기는 양이 구체적인 형태로 내게 제시해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야. 그래도…………"- P238
"그래도 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도가니 같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한 거야. 거기에 몸을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우주의 한 지점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역동성에 가깝지."
"그래도 너는 그걸 거부했겠지?"
"그래, 내 몸과 함께 모든 것은 매장되었어. 앞으로 한 가지만 더 하면 영원히 매장돼."
"앞으로 하나?"
"앞으로 한 가지야. 그건 나중에 너에게 부탁하게 될 거야. 지금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P239
"혈혹은 채찍 비슷한 것인가 보지?"라고 나는 물었다. "양이 숙주를 조종하기 위한?"
"맞았어.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양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거야."- P239
"선생이 목표로 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쳤어. 아마 그 도가니 속의 풍경을 견딜 수 없었겠지. 양은 그를 이용해서 강대한 권력 기구를 만들었지. 그러기 위해서 양은 그의 안으로 들어간 거야. 말하자면 일회용이지. 사상적으로 그 남자는 제로야."
"그리고 선생이 죽은 다음에 너를 이용해서 그 권력 기구를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던 거고."
"그렇지."
"그다음에는 무엇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완전히 무정부적이고 혼란스런 관념의 왕국이지. 거기서는 모든 대립이 일체화되는 거야. 그 중심에 나와 양이 있지."- P240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그냥 좋은 거야. 너와 마시는 맥주라든가∙∙∙∙∙∙."- P240
"우리는 아무래도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낸 모양이야."- P241
"하지만 그건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사라질 거였어. 나나 너나 그리고 여러 여자들 안에서 뭔가가 사라져가듯이 말이야."- P244
"평범함은 머나먼 길을 걷는다"- P248
모든 것이 끝나려고 한다.- P250
"잘되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잘되면 좋을 텐데" 하고 상대방도 말했다.- P251
"왜 처음부터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은 거죠?"
"당신이 자발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 여기에 와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그를 구렁텅이에서 끌어내주기를 바랐던 거야."
"구렁텅이?"
"정신적인 구렁텅이지. 사람은 양에게 홀리게 되면 일시적으로 얼이 빠지게 되는 법이거든. 말하자면 기억상실증 비슷한 거지. 거기서 그를 끌어내주는 것이 당신의 임무였던 거야. 그런데 자네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여야 했어. 어때, 간단하지?"
"그렇군요."- P255
"근원을 밝히면 모든 게 간단하네.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힘들 뿐이야. 컴퓨터는 인간의 감정의 흔들림까지는 계산해주지 않거든. 말하자면 수작업手作業이지. 하지만 애써서 짠 프로그램이 생각대로 진행돼주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지."- P255
"양을 쫓는 모험은 결말로 향하고 있어. 나의 계산과 당신의 순진함 덕분에 말이야. 나는 그를 얻게 되는 거야. 맞지?"- P255
어쨌든 나는 삶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설사 그것이 따분함으로 가득 찬 평범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세계인 것이다.- P258
하루하루 나는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것이다. 언젠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P263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들 내가 제대로 깨어 있길 바란다.- P263
"아마 이제 모든 게 잘될 거예요"라고 나는 말했다. "어느 정도 시간만 지나면 말이지요."- P264
"예의 바른 놈은 오래 앉아 있지 않는 법이거든"- P267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손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권력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으며 어떤 규범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회는 더 강한 사람을 요구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나약할 수밖에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더 인간적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이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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