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저자는 레이먼드 카버가 에세이에서 했던 말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소설을 쓰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아,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와 같은 후회와 미련이 남기 마련이고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가 되어 자신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ㅡ.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졸역 「글쓰기에 대하여」) _레이먼드 카버- P168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시간에 컨트롤 당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는 역시 수동적이 되고 맙니다. ‘시간과 밀물 썰물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쪽에서 기다릴 생각이 없다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이쪽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수동적이 아니라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도전해가는 것입니다.- P169
작품에 대한 판단은,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립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명확하게 판정해주는 것은 시간입니다. 작가는 입 다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P170
나의 어떤 작품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쓴 시점에는 내가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유감스럽기는 해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부족한 역량은 나중에 노력해서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잃은 기회를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P170
글을 쓸 수 있는 내 나름의 고유한 시스템을 나는 오랜 세월을 들여 마련하고 내 나름대로 꼼꼼하고 주의 깊게 정비해가며 소중하게 유지 관리해왔습니다. 먼지를 닦고 기름을 칠하고 녹이 슬지 않게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보잘것없지만, 자부심을 느낍니다. 개개의 작품의 완성도나 평가에 대해 말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전반적인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나로서는 더 즐겁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구체적인 보람도 있습니다.- P170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실감‘을 믿기로 하십시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도 또한 그걸 읽는 자로서도 ‘실감‘보다 더 기분 좋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P171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밀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없이 개인적인 일입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을 마주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없었던 지점에서 가공의 이야기를 일궈내고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바꿔나갑니다. 형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주관적인 일들을 형상이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적어도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환해간다ㅡ극히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것이 우리 소설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작업입니다.- P175
어떤 장소가 됐든 인간이 소설을 쓰려고 하는 곳은 모두 다 밀실이고 이동식 서재입니다.- P177
내가 생각건대 사람은 원래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한 개인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적인 힘을 바싹바싹 느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생해가며 열심히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P177
그 계기가 어떤 것이든 일단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소설가는 외톨이가 됩니다. 아무도 그/그녀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리서처가 붙는 일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역할은 단지 자료나 재료를 수집하는 것뿐입니다. 아무도 그/그녀의 머릿속을 정리해주지 않고 아무도 적합한 단어를 어딘가에서 찾아와주지 않습니다. 일단 스스로 시작한 일은 스스로 추진해나가고 스스로 완성해내야 합니다.- P178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인데, 장편소설 한 편을 쓰려면 일 년 이상(이 년, 때로는 삼 년)을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서 혼자 꼬박꼬박 원고를 쓰게 됩니다.- P178
날이면 날마다 판박이처럼 똑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P179
고독한 작업, 이라고 하면 너무도 범속한 표현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ㅡ특히 긴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ㅡ실제로 상당히 고독한 작업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라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물론 잘되면), 그것을 써내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서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P179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하루씩 꾸준하게)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P180
긴 세월 동안 창작 활동을 이어가려면 장편소설 작가든 단편소설 작가든 지속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해줄 만한 지속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ㅡ기초 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P181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얘기지만)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고의 민첩성, 정신의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됩니다.- P183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에요"- P183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운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유산소운동이란 수영이나 조깅 같은 장시간에 걸친 적당한 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뉴런도 그대로 두면 28시간 뒤에는 별 쓸모도 없이 소멸해버립니다. 정말 아깝지요. 하지만 막 태어난 뉴런에 지적인 자극을 주면 그게 활성화해서 뇌 내의 네트워크와 이어져 신호 전달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즉 뇌 내 네트워크가 좀 더 확장되고 촘촘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과 기억 능력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임기응변으로 사고를 전환하거나 비범한 창조력을 발휘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지요. 좀 더 복잡한 사고를 하고 대담한 발상을 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즉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작가가 행하는 종류의 창조적인 노동에는 매우 이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셈입니다.- P184
자연스러운 감촉으로서, 실감으로서, 그런 게 내 안에 있습니다.- P185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 P187
몸의 정직한 느낌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뭔가를 창조하려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작업이었구나, 라고 통감했습니다. 정신이든 두뇌든 그건 결국 똑같이 우리 육체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과 두뇌와 신체의 경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ㅡ생리학자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ㅡ그다지 뚜렷하게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P188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tell a story 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P188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ㅡ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ㅡ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P189
깊은 어둠의 힘에 대항하려면, 그리고 다양한 위험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수치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하지 않은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강한 편이 훨씬 더 좋겠지요. 그리고 그 강함이란 타인과 비교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강함을 말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작업을 통해 그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차츰차츰 깨달았습니다.- P189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P190
자신의 지금 상태를 최선의 모양새로 유지하기 위한 강함- P191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P196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P198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傾向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혹은 반동)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육체적인 physical 힘과 정신적인 spiritual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P199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균형 있게 양립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각 서로를 유효하게 보조해나가는 태세를 만들어야 합니다. 싸움이 장기전일수록 이 이론은 보다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P200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ㅡ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P201
나는 살아가고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나갔습니다. ...(중략)... 당신은 당신의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P201
언어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살아 있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려고 하는 것이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유연성flexibility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자유자재로 움직여 가장 유효한 접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12
소설가란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자꾸자꾸 만들어가는 사람- P228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P228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P228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나하나의 개성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학교는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 사회 자체도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P230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36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 등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하면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7
어차피 난감한 일을 겪어야 한다면 거기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도 건져야지요(아무튼 본전이라도 뽑자, 라는). 당연히 그때는 나름대로 상처를 받고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그런 체험은 소설가인 나에게는 무척 자양분이 가득한 것이었구나, 그런 느낌을 이제는 갖고 있습니다. 물론 멋지고 즐거운 일도 상당히 많았을 텐데,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왠지 네거티브한 체험 쪽입니다. 다시 떠올려서 즐거운 일보다 오히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떠올라요. 결국은 그런 일에서 오히려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P239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240
나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좋아, 이번에는 이런 것에 도전해보자‘라는 구체적인 목표ㅡ대부분은 기술적인, 눈에 보이는 목표ㅡ를 한두 가지씩 설정했습니다. 나는 그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과제를 달성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것을 해내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작가로서 성장한다는 구체적인 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단 한 단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것처럼. 소설가의 좋은 점은 설령 쉰 살이 되더라도, 예순 살이 되더라도, 그런 발전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연령제한이라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선수라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 되겠지요.- P245
일인칭 소설을 쓸 때, 많은 경우 나는 주인공인 (혹은 화자인) ‘나‘를 대략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인식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 형태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나는 나 자신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분할하고 스토리 안에 던져 넣는 것을 통해 나라는 인간을 검증하고 나와 타자와의 혹은 세계와의 접점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처음 한동안은 그런 글쓰기 방식이 내게 잘 맞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애호하는 소설도 대부분 일인칭이었습니다.- P246
일인칭이 가진 제약의 벽은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점점 답답한 것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P247
분할한 나 자신을 타자에 위탁할 수 있었다- P248
소설적 시좌를 바꾸면 소설의 구조 자체에 크게 손을 대야 하고 그 변혁을 뒷받침하기 위한 확실한 소설적 기술과 기초 체력도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상황을 봐가면서 단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신체로 말하면, 운동 목적에 맞춰 골격과 근육을 아주 조금씩 개조해나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 개조ㅡ거기에는 공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P248
캐릭터는 소설에서 지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설가는 현실감이 있고 그러면서도 흥미롭고, 언동에 적당히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는 인물을 작품의 중심에ㅡ 혹은 중심 근처에ㅡ앉혀야만 합니다. 뻔히 알 만한 인물들이 뻔히 알만한 말만 하거나 뻔히 알 만한 짓만 하는 소설이라면 독자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겠지요. 물론 ‘그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써내는 소설이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분도 더러 계시겠지만 나로서는(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으로서) 그런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흥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P249
하지만 ‘리얼하고 흥미롭고 어느 정도 예측 불가능한 것‘ 이상으로 소설 캐릭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나로서는 ‘그 인물이 얼마나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느냐 하는 점입니다. 등장인물을 만든 것은 물론 작자지만,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등장인물은 어느 시점부터 작자의 손을 떠나 자립적으로 움직입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픽션 작가들이 흔쾌히 인정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소설을 계속 써낸다는 건 상당히 빡빡하고 힘겨운 작업이 됩니다. 소설이 제대로 궤도에 오르면 등장인물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스토리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고, 그 결과 소설가는 단지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그대로 문장으로 받아쓰기만 하는 지극히 행복한 상황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소설가의 손을 잡고 그/그녀가 미처 예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장소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P250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 P251
사라의 말 한 마디가 거의 한 순간에 이 소설의 방향과 성격과 규모와 구조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건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실은 작자인 나를 향해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너는 이제 그다음 스토리를 써야 한다. 너는 그 영역에 이미 발을 들였고 이미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요컨대 사라 역시 나의 분신의 투영이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내 의식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나에게 지금 이 지점에 안주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짚어주었습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글을 써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작품입니다. 형식은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복합적으로, 또한 은유적으로 펼쳐진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