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년 초에 뭣도 모르고 도전했다가 독자인 나의 배경지식 부족과 함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된 나머지 오랫동안 읽는 것을 내려놓았었다. 그러다가 요 근래에 개인적으로 읽었던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헤르쉬트 07769》라는 작품이 계기가 되어 이 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되어 다시 읽어볼 마음이 샘솟았고 오늘에야 비로소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라슬로의 저 소설(헤르쉬트...)과 이 책(창조적 시선)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길래 하고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을 수 있기에 잠깐 설명하자면, 두 책은 모두 독일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교집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몇 일 전에《헤르쉬트...》 리뷰에서도 살짝 언급했었지만, 그 소설 속 배경이 독일이다보니 독일의 지역이나 문화 등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편 이《창조적 시선》의 저자인 김정운 님은 과거 독일에서 유학을 했던 경험도 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주변 지인들과 함께 독일의 특정 지역들을 방문함과 동시에 ‘바우하우스‘라고 하는 것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풀어놓은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독자인 내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완전히 생소한 상태였다면 이 두꺼운 책(창조적 시선)을 읽어나가는데 상당히 부담스러웠을텐데, 감사하게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을 통해 독일에 대한 배경지식 일부 및 익숙한 느낌을 함께 얻었기에 오늘 이 책(창조적 시선)을 읽기로 다시 결심하고 읽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쓰다보니 개인적인 잡설이 길어졌는데, 이제 본문 내용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책에 대한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추얼ritual‘이라는 키워드가 새롭게 언급되었었다. 이것은 우리말로 ‘의식, 의례‘ 같은 것을 지칭하는데,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의미 구성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를 확인하는 의식을 통해 개인의 불안이나 고통을 견뎌냄은 물론이고, 집단의 응집력을 결속시키는 역할도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저자는 리추얼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교 의례를 언급한다. 종교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본문의 사례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제 있었던 세월호 12주기 추모식이 문득 생각났다. 이 추모가 단지 어떤 형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관련 유가족들의 아픔과 상처를 조금이나마 풀어내고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과 서로 만남을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로를 받는 시간으로써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불안하고 힘들수록 리추얼은 반복된다는 얘기도 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을 단순히 힘들다는 말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겠지만 본문 내용에 근거해 추론해보자면 그 힘듦의 정도가 차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기에 추모식으로 대변되는 리추얼이 12년째 계속 이어지고 반복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의미 구성 과정이 가장 세련된(!) 리추얼은 종교 의례다. 유교적 전통에 따른 명절의 차례, 불교의 불공, 상징적 행위로 가득한 천주교의 미사, 설교자의 메시지가 강조되는 기독교의 예배와 같은 종교적 리추얼은 다양한 장치를 동원하여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지속해서 의미를 생산한다.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오래살며 행복하다고 느낀다. 살아야 하는 의미를 매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P59
의미가 생성되지 않고 형식만 남아 있다면 이는 더 이상 리추얼이 아니다. 습관일 따름이다.-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