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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지난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하는데, 오늘도 이와 관련된 얘기들이 이어진다. 다소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내용이라 모호한 느낌도 들긴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라는 식의 인식을 화자가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인 내가 재작년에 개인적으로 읽었던 욘 포세 작가의 사고방식과 이 책의 저자의 사고방식이 일정부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특별히 시간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 같은 것들이 이런 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약간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들이 종종 말하는 ‘현재의 중요성‘이라는 것에 대해 보다더 심도있게 고민해보고 그 중요성을 더 깊이있게 느낄 수 있었다. 1분 1초, 매순간이 정말로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된다.

우리가 따로따로 별개로 말하는 건 틀린 게 아니다, 세계와 본질을 따로따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이 본질에 대해서는,- P425
여러분은 이것을 직접 더 간단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뒤범벅된 장애물의 형태로 이해하리라, 무시무시하고, 괴물같이 광대하며, 우스꽝스러운 장애물의 경로, 오로지 보이지 않는 장애물과 오로지 숨겨진 저항이 사방에 있을 뿐이다,- P425
여러분 앞에 놓인 세계를 상상해보라, 더 정확하게는 거대하고 광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거대하고 광대한 세계를 상상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하나하나의 사건이 장애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동력, 말하자면 세계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힘,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힘보다는 오히려 장애물에 의존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P426
이것은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그건 상상될 수 있다, 무한정의 아원자 입자 영역에서부터 무한정의 우주 영역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온 세계를 훑고 가보라, 그러면 사실을 볼수 있을 것이다, 사건일 수도, 사물일 수도, 사건의 부재일 수도, 사물의 부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 이런 후자 쪽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사실은 부재이고, 사물이나 사건이 비발생했다는 정반대의 실제 사실을 지니게 된다,- P426
세계를 묶어주는 것은 장애물들이며, 구조를 말할 수 있는 한, 장애물들이 세계에 구조를 부여한다, 장애물들은 앞으로 무엇이 장애물이 되고 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것이 되든, 저것이 되든, 나쁜 늑대가 되든, 빨간 두건이 되든, 어느 쪽은 될 것이며, 어느 쪽은 되지 않을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혹은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 과연 시작이라도 할 것인지,- P426
주님이 일으키시지 않은 것, 혹은 주님이 없애버리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다, 삶과 죽음의 주인, 세계 뒤에 있는 가장 존엄한 세계 질서, 존재의 가장 엄청난 기념비적인 구조, 이 모든 것은 또한 현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고 이건 정말로 별로 웃기지 않은 얘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중략)... 이 본질은 전혀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 속에서 이 본질은 오로지 결과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다,- P427
그에게는 삶이 있었다, 그 삶 속에서 여기저기를 다녔다, 멈춤이 있었고 이동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길로는 갈 수 없었고, 다음 순간에는 저 길로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그는 서 있다, 지금은 사방에 장애물뿐이다, 거대한 외통수라고 할 수 있겠지, 남아 있는 유일한것은 플라스틱 물병 속의 마지막 몇 모금뿐이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마실 수 있다, 다시 입 한가득 물을 들이켤 수 있다, 그가 영원히 멈추기 전에,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저 거대한 냄새나는 안개가 그를 완전히 삼켜서 그를 그 누구도 도로 찾아올 수 없게 되기 전에- P427
교회는 성경이 읽히고 이해되는 장소입니다.- P429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 : 콘스탄틴 P. 카바피 Constantine P. Cavafy라고도 불린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그리스계 이집트 시인으로, 언론인이자 공무원이기도 했으며, 남긴 155편의 시 중 수십여 편이 미완이다.- P441
데르비시는 수피 우애단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들의 집단 명상 방식으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 있다.- P460
메스네비는 2행구로 이루어진 시적 형식- P461
이슬람에서 마울라나는 튀르키예어의 메블라나와 마찬가지로 스승을 의미하는 칭호다.- P461
카이단리크 : 튀르키예어로 주전자라는 뜻- P462
술탄아메트 카미이 : 튀르키예어로 사원- P462
사마하네 : 힌디어로 ‘생각해봐요‘라는 뜻- P462
카눈 :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연주하는 현악기- P462
카리예 뮈제시 : Kariye Mizesi, 카리예 박물관이라는 뜻- P462
나는 여기 모든 것에서부터 떠납니다: 골짜기, 언덕, 길,
그리고 정원의 어치 새들, 나는 여기 술통과 사제, 하늘과 땅, 봄과 가을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출구 경로, 부엌의 저녁, 마지막 연인의 눈길, 부르르 몸이 떨리던 모든 도시행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땅 위에 떨어지는 짙은 황혼, 중력, 희망, 매혹, 평온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사랑하는 이들과 내게 가까웠던 이들을, 나를 감동시켰던 모든 것, 내게 충격을 주었던 모든 것, 나를 매혹시키고 고양시켰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고귀한 이들, 자애로운 이들, 유쾌한 이들, 악마적으로 아름다운 이들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새로 돋는 새순, 모든 탄생과 존재를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주문, 불가사의, 거리로 인한 도취, 무한한 끈기, 영원을 두고 떠납니다- P468
헝가리어 ‘csapot es papot (술통 꼭지와 사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19세기 시가 출처다. 즉, ‘술통과 사제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잊었다)"이라는 의미다.- P467
여기에 나는 이 땅과 이별을 두고 갑니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올 일을 이미 들여다보았기에,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P468
"현대의 헝가리인 아포칼립스 대가(the contemporary Hungarian Apocalypse Master)" _수전 손택- P469
이제 우리가 거의 종말에 다다랐다는 감각- P470
우리 인생의 내러티브는 죽음으로써 완결된다- P470
한순간의 방심이 연속되면서 반드시 실현되는 파국- P470
결국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 속 세계는 모두 재난과 전쟁, 죽음으로 향하는 필연성을 그린다.- P470
탈출-묶임의 무한 연쇄 상태- P471
이는 세계에 구속된 인간의 운명이다. 종말이 다가오는 (혹은 이미 다가온)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탈출은 매번 실패하고, 그 자리에 멈추거나 돌아가는 것만이 인간의 숙명처럼 보인다.- P471
이 소설집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티브 중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우리는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라는 만물 유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전체와 개인의 삶이다.- P472
<속도에 관하여>는 지구의 자전 속도를 넘어서려는 개인의 속도에 대해 말하는데, 여기서 인간은 지구의 속도를 넘어서려고 할수록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실로 인간은 세계를 넘어서 존재할 수 없고, 개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자신 앞에 주어진 현실, 이 순간, 세부적인 분야뿐이다. 우리는현실이라는 미궁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이 물이 모여 거대한 삶과 죽음의 강물을 이루고 그것이 흘러가 폭포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방울의 물인 개인은 그를 볼 수 없으며 예측할 수도 없다.- P472
오래전 성인의 말씀은 100명의 입을 거친 후에는 이미 원래의 아우라를 잃고 (<모두 다 해서 100명의 사람>), 본래의 텍스트가 사라진 백지를 주석을 통해 원문을 재구성하듯이, 우리에게 남은 역사는 재해석과 재구성의 역사인 것이다(<헤라클레이토스의 길 위가 아니라>, <이스탄불의 백조).- P472
역사는 강물의 흐름처럼 유유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와중에 부딪히는 땅의 지형처럼 장애물에 의해 형성되고,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P472
모든 내러티브는 끝으로 완성되듯이, 우리는 순간을 넘어설 때만 전체를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전체를 보는 순간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이런 예측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에서, 인간은 전체를 이해하고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삶을 넘어서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그칠 수 없는 존재다. 여기에 시니컬하면서도 숭고한 역설이 깃든다.- P473
이 소설집은 인간의 한계를 통찰하지만 그를 넘어서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문학에 대한 경의다.- P473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한 인터뷰에서 "긴 문장이 내게는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몇 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한 문장을 쓸 때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인간이 말을 할 때는 반복하고 다시 시작하며 되돌아가서 끝없이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가끔은 1인칭과 3인칭이 분리되지 않고, 누가 묻고 누가 대답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사고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언어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실제의 문장으로 표현되고, 그의 문체적인 특성은 내용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P474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은 기존 서사의 법칙을 깨는 난해함, 마침표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주하는 방대한 레퍼런스로 독해가 쉽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P473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길을 잃고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헤매듯이, 문장도 출구를 찾지 않고 그와 함께 질주한다. 결국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침표를 만날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의 삶도 곧 다가올 종말에 이르러서야 마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종말의 감각 속의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행동은 결국 모여서 파국에 닿겠지만, 그 시간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것은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에서 나오듯이 무효할지 모르는 도덕법칙에 대한 인식이다.- P474
원래 헝가리어본의 제목은 ‘세계는 굴러간다‘는 뜻이지만 수록된 단편의 제목은 ‘Megy a világ elöre‘로 한 단어가 더 붙었다. ‘előre‘는 ‘앞으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어 제목도 ‘앞으로의 세계‘라는 표현으로 역시 전진하는 방향을 표시했다. 세계는 종말을 향하지만, 앞으로 굴러가고 계속된다.- P474
필연적인 파국을 막기 위해 헛되이 저항해보지만 하찮은 결과만을 남길 뿐인 인간, 그렇지만 저항이 아니라면 달리 뭘 할 수 있나? 저항은 멜랑콜리를 남기지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듯 아직 끝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갈 길은 무엇인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문학적 탐구다. 대답이 그 안에 있는지는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475
소설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다고 작별 인사를 했지만, 우리의 작별 인사는 아직 저 앞에 남아 있다.-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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