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약 3주 정도만에 다시 읽는다. 그동안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읽느라 한동안 손놓고 있었는데, 드디어 다시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은 ‘훈자‘라는 단편 소설의 중후반부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었는데, 훈자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에 맞닿아있는 작은 소도시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계시겠지만, 독자인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지명이다.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 소설에는 한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습관적으로 훈자를 생각한다고 한다. 꿈에서도 나올정도라고 하니 뭐 말 다했다. 근데, 본문을 읽다보면 그 꿈의 내용이 그다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뭔가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훈자가 아닌 훈자라는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에 대한 궁금증은 뒷부분을 읽어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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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의 남은 뒷부분을 읽어봤는데, 솔직히 저자가 이 작품에서 의도하려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독자인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자면 ‘훈자‘에 나오는 그 여자는 훈자라는 것을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아와 동일시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훈자가 아닌 훈자라는 것은 자신이 꿈꾸던 자아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의 자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정신없이 살아가다보면 이상적인 자아든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아든 뭐든 생각할 겨를없이 마치 화살이 날아가듯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게 우리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인데 이 ‘훈자‘에 관한 다른 분들의 생각이나 작가님의 해설을 들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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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에 뒤이어서 나온 작품은 ‘파란 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독자인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의 책 중 《바람이 분다, 가라》에 나왔던 부분과 비슷한 부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먹과 물의 삼투압 현상의 원리를 이용한 작품 제작 과정이었는데, 아마도 출간년도 상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이 먼저 출간된 것으로 보아 여기 나왔던 이 모티브가 이후에 나온 《바람이 분다, 가라》 에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은 같은 작가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다보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스토리적인 부분에서는 딱히 코멘트 할 건 없지만 굳이 몇마디 붙여보자면,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생生과 사死가 큰 틀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약간은 철학적인 혹은 추상적인 생각같은 것들을 해볼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위의 훈자에 적은 것처럼 전문가의 비평이나 다른 독자님들의 평을 참조하여 좀 더 심화된 이해를 할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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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로 만난 ‘왼손‘이라는 소설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이다. 주인공인 이성진이라는 인물은 은행의 대부계에서 일하는 은행원인데, 그의 상사인 신부장의 까칠한 태도로 인해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왼손‘인 이유는 이성진의 왼손이 이성으로 컨트롤 되지 않은 채 철저히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설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본능적인 왼손은 결국 평소 불편하게 생각하던 신부장을 향해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때리려는 액션까지 취하는 상황까지 연출하고 만다. 이성진은 자신의 왼손을 강제로라도 통제하고자 오른손으로 왼손을 강하게 잡으려고 애쓰지만, 이런 상황이 회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상사는 이성진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이성진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과거 대학생 시절 극회활동을 하면서 짝사랑했던 선혜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성진은 엄연한 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끌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선혜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성진의 통제되지 않는 본능적인 왼손이 그 발단이 된 것이었다. 본문에서는 성진과 선혜 간의 분위기가 초반에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성진의 왼손이 둘의 사이를 파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성진의 바람을 알아챈 성진의 부인은 성진과의 결혼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성진은 선혜와도, 자신의 부인과도 헤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결국 성진은 자신의 왼손을 아주 그냥 박살 내기로 작정을 하고 오른손에 망치까지 쥐어들지만, 왼손의 생존 본능 때문이었을까? 왼손은 오히려 오른손을 제압하고 심지어는 칼로 오른손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왼손과 오른손이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 성진은 몸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는데, 독자인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자의 최후가 정말 비참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최후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도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한편 한 가지 의문도 들었는데, 왼손이 컨트롤되지 않는다는 설정을 저자가 한 이유도 궁금했다. 단순히 내가 앞서 적은 말처럼 그저 본능 제어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독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말이다. 역시나 이 소설에 관해서도 전문가의 해설이나 다른 독자님들의 생각을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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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지막으로 수록된 ‘노랑무늬영원‘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면, 그동안 이 소설집의 앞부분에 나왔던 에피소드들(ex> 왼손, 개, 그림 등)을 핵심 모티브로 활용하는 듯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P118
그 여자의 훈자는 더 이상 영문판 《론리 플래닛》 파키스탄 편에 있지 않았고, 그 여자가 암호를 걸어놓은 파일에 담긴 신장 지방과 파키스탄 지도에 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훈자, 라고 써넣으면 떠오르는 블로그들, 카페들에 있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화장품의 이름, 깎은 듯 아름다운 여배우의 옆얼굴에 있지 않았다.- P118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P121
그 여자의 입이 틀어막히면 훈자도 입이 틀어막혔다.
빙하가 녹은 뿌연 물이 흰 피처럼 배수관을 흐르는 동안,
그 여자가 목마르면 훈자도 목이 말랐다.
그 여자가 더럽혀지면 훈자도 더럽혀졌다.
그 여자가 침을 뱉으면 훈자도 침을 뱉었다.- P124
아니, 내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내 삶이야.- P125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P132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 인간적인 한계를 느껴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P136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왜 바로 시작하지 않는거지?- P140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그러니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이지.- P142
문득 나는 당신의 병과 당신을 어디까지 분리할 수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신의 성격, 당신의 말투, 당신의 걸음걸이...... 그러니까 당신의 모든 것은 당신의 병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프지 않았다면, 하고 상상하면 혼란스러웠습니다. 아픈 당신을 지워버린 뒤에 남는 당신의 정수, 그 위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왔을 또 다른 당신의 모습들은 내가 알던 당신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랐을까요.- P142
무엇보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어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신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P146
희망의 싹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P146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P154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P154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P154
신부장은 당뇨기가 있다고 했잖아. 체력이 약하니 짜증이 자주 나는 것도 당연하지. 자식 자랑할 때봐.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지.- P162
알고 있었어.
......뭘?
네가 날 좋아하는 거.
그런데 왜.....
왜 줄곧 모르는 척했냐구?
그녀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고백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만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P174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P175
섹스할 때, 나 자신을 어쩔 수 없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싫어.- P178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80
지점장의 갑작스런 존댓말이 마지막 경고이자 배려라는 것을 그는 알아들었다.- P182
없었던 일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P183
이젠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P187
모든 게 이 손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왼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P197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아. 이것 때문에 다 엉망이 됐어. 직장도 잘렸어. 이게 아니었으면, 그날 여기로 들어오지도 않았을거고....- P197
.....새장 밖으로 한번 나온 새한테 가장 무서운 건 새장일거야. 그런 새를 붙잡으려면 발톱이며 부리에 찢길 수밖에 없겠지. 설령 새장에 다시 넣는 데 성공한다 해도 아마 새는 제풀에 죽고 말 거야. 네가 날 붙잡을 거란 얘기가 아니라, 만에 하나 붙잡았다 해도 너한테 득이 될 거 없었을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한 거야. 미안해할 것 없어.- P200
내가 가라고 했지. 내가 이래서 연애 따위 다시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열에 들뜬 생각, 눈물, 나답지 않은 행동, 복잡한것, 바닥까지 보고 또 보여주는 것...... 싫고 지겨워. 이쯤에서 그냥 가.- P200
미안해 정말, 이 손 때문에…………- P201
......일밖에 모르는 당신과 함께 사는 거 불행했어. 당신은아이도 사랑하지 않고, 주말에 형식적으로 놀아주는 한두 시간동안에도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잖아. 지난 몇 년간 나한테 당신은 현금 지급기 같은 거였고, 난 당신한테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기계 같은 거였지. ...... 아직 늦지 않았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P205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다시는 꿈틀거리지 말라고 했지!- P207
난 널 잘라버릴 수도 있어.... 알겠어? 뼈만 부러뜨리는 걸 다행으로 알아.- P207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한순간, 울부짖는 비명이 아파트의 정적을 찢었다.- P208
나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방금 남편이 내 뒷모습을 향해 던진 말의 여운을 곱씹어본다. 외출이라도 할 건가. 그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인내와 짜증, 자제된 적개심이다. 약간의 경멸감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신다. 계속해서 서랍을 뒤적인다.- P212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P216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P216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P216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P220
며칠 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P222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P222
매 순간 나는 삶과 자신 사이에 생겨난 거리를 느꼈다. 처음경험하는 헐거움이었다. 애잔히 찰랑거리는 감정, 사랑, 연민따위・・・・・・ 환상과 주관성, 소위 정이라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감정들이 증발되었다.- P227
아마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P227
회복되고 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작업이었다. 세상의 어떤 즐거운 일들보다 그것만이 간절했다.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여행조차 나에게 극히 부수적인 것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내가 마음으로 작업을 포기한 것은, 퇴원하고도 한참 뒤, 오른손마저 망가졌음을 알았을 때였다.- P230
이젠 두 손 다 틀렸어, 라고 중얼거린 순간이, 나에게는 그 이른 봄날의 교통사고보다 더 결정적인ㅡ더 무서운ㅡ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연극이 갑자기 막을 내린 데 이어, 객석에서조차 추방된 것과 같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부터 시작됐다. 가까스로 유예되고 있었던, 격렬하고 부정적인,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 후회, 수치, 분노, 원망, 증오, 억울함, 비참함, 살의. 그리고 혼자라는 것. 철저히, 당연히, 언제까지든 혼자라는 것.-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