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읽고보고듣고쓰고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이정희는 강석원과 만나기로 한 시각에 자신이 숨겨두었던 열쇠를 이용해 인주의 작업실에 들어간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있어야 할 인주의 그림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이외에도 서랍에 있어야 할 인주와 관련된 물건들이 없어진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낯선 스케치북과 낡은 노트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정희는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자신이 인주의 사망 전 행적을 온전히 짐작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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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강석원과 이정희가 서인주에 관해 있었던 일을 서로 얘기하면서 그간 각자가 인주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서로의 면전에서 토해낸다. 그리고 이후에는 상대방을 정말로 죽여버릴듯한 기세로 싸운다. 개인적으로는 두 인물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살기殺氣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도 피 튀기는 물리적 충돌을 주고 받는 장면을 보면서 소설 속 긴장감이 고조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을 영화로 봐도 실감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강석원과 이정희의 불꽃튀는 싸움은 물리적인 충돌 장면만 놓고 보면 이정희가 패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서인주의 작품들이 불에 타서 전소되었기에 두 사람 모두 웃을 수 없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희는 극적으로 화재가 난 장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뒤 그당시를 회상하는데, 독자인 나는 이정희가 했던 말 중에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이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이 소설 속에서 이정희에게 피할 수 없는 길은 바로 강석원이 쓴 책의 왜곡된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록 그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이정희는 그 험난한 과정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로 표현하면서 힘들지만 가야만 하는 혹은 겪어내야만 하는 과정을 겪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과정이 정말 죽을만큼 힘들어서 그냥 차라리 죽는게 속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일을 만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고난을 내가 피할 수 없다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소설 속 이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왔던 진짜 목숨이 위태위태했던 이정희의 모습이 다시금 아른거린다.

소설의 스토리 자체도 흥미진진 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부터 위에서 언급한 교훈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만 읽었는데도 뭔가 실감나는 게 느껴졌는데, 영상으로 보면 훨씬 더 실감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독자인 나도 행복했다.

결국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짐작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분노 대신 은둔을 택한 이유를.
짧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를 건너다보던 얼굴을.
내 병실 문 앞에 완고하게 서 있던 깡마른 어깨를.
물기 없이도 착잡하게 빛나던, 빛나던 네 두 눈을.- P372
스케치북을 덮고 낡은 공책을 펼친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삼촌의 필적이다.- P372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P373
......당신이 죽였지.
이를 악물고 나는 내뱉는다.
당신이 인주를 죽였지. 인주의 차를 당신의 차로 뒤쫓아갔지. 인주를 들이받은 충격으로 당신도 허리를 다쳤지.- P374
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죽일 수 있을까. 내 손등으로 느껴지는 그의 더운 숨. 미지근한 그의 체온을 내가 끊어버릴수 있다는 것, 영원히 차갑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뚜렷하다.- P374
......이 방에서 밤을 새우고 있으면, 살아 있는 서인주를 내가 알았던 게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았어. 그 체온, 차가운 입술, 악수할 때 느껴지던 여자답지 않게 세찬 악력...... 그 모든 게 날아가버리고, 서인주의 이미지, 서인주의 필적, 서인주의 그림...... 그러니까, 서인주의 깨끗한 흔적들만 남았지. 그것들이 오히려 나에게는 안전하고.......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어.- P375
우리는 닮은 데가 있어, 그렇지? 적당히 미쳤고 끈질기고 나약해.- P375
당신이 밀어붙였겠지... 당신한테서 도망치는 인주를 견딜 수 없었겠지. 죽여서라도 갖고 싶었겠지. 어떤 남자를 만나러 가는 여행인지.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겠지. 인주는 당신을 피했을 테니까. 당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었으니까. 젖 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면서, 당신은 인주를 밀어붙였겠지.- P376
네가 그 사람의 코트를 입고 있었을 때 ...... 그 사람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어. 아니, 귀신으로 돌아온 줄 알았지. 그때부터 너를 죽이고 싶었어.- P376
네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린다.- P376
그해 내내..... 서인주가 맴돌았던 사람은 바로 너였어. 나는 그걸 몰랐어. 최근까지도, 그 빌어먹을 상담소를 찾아간 오늘 아침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어. 어떤 남자를 만난 거라고만 생각했지. 지친 얼굴로 돌아와서………지극한 사랑 때문에 고통받은 얼굴로 돌아와서 날 밀어내는 걸 견딜 수 없었지. 미칠 것 같았지. 그런데 왜 너였지? 왜 너는 그 사람에게 그렇게 중요했지? 너 따위, 더러운.....- P377
이것들이 없으면 네 모든 주장은 의미 없는 정신병자의 독백이 돼.- P377
・・・・・・ 처음부터, 이 그림들은 서인주에게 어울리지 않았어. 초월하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껴안았어야지. 싸웠어야지.
서서히 불길이 올라오는 그림을 꿈꾸듯 바라보다 그는 중얼거린다.
바깥쪽은 천천히 타는군. 먹의 밀도가 높아선가? 하지만 가운데에 불을 붙이면... 물이 번졌던 길을 따라 불길이 번지겠지.- P378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너에게 연민을 느끼거든. ・・・・・・ 더구나, 이 그림들의 마지막을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P379
또 다른 평전을 쓰다니, 제법 재미있는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제 너는 방화범, 미친 여자, 자살자일 뿐이야. ......억울한가? 그럼, 이 년 전에 가려고 했던 길을 지금 간다고 생각하지.- P379
믿을 수 없어. 너 같은 인간을, 그토록 서인주가 사랑했다니...... 내가, 단 하룻동안 가져보았던 여자가...... 평생을.- P379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P381
마지막 힘을 다해 더 앞으로 기었다.- P381
인주도 이 모든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P384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고통이 더 멀어진다.- P384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P385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거지.- P386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P386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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