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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지난번 포스팅에 적었듯이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류인섭이라는 심리상담가를 만나서 서인주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이동선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인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류인섭의 얘기로 인해 소설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서인주와 관련된 책을 왜곡된 관점으로 썼다는 얘기를 앞선 포스팅에서 했던 적이 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가 이 강석원의 책에 나온 왜곡된 내용들을 바로잡고자 자신이 직접 수집한 정보와 각종 참고자료들을 바탕으로 친구인 서인주에 관한 책을 출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출간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는 심리상담가인 류인섭이 아닐까 싶은데, 그가 이정희에게 준 정보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도 거의 한 챕터에 걸쳐서 인주와 관련이 있는 기나긴 이야기가 나온 것을 생각해본다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류인섭이라는 키맨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뒤이어질 내용들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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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 추가로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서인주와 이정희에 대한 얘기들이 몇 가지 더 나온다.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상처와 아픔을 느낄 수 있을만한 내용이었다.

챕터를 바꿔서 드디어 이 소설의 마지막 챕터이자 소설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10장 ‘바람이 분다, 가라‘ 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강석원이 갑작스레 등장해 이정희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정희가 친구인 서인주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은 강석원이 무언가를 담판지으려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추가로 좀 더 보태자면 독자인 나는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예상했던 부분이긴 한데 소설 속 이정희라는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의 분신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볼 수 있었다. 10장 초반부에 강석원이 이정희의 프로필을 읊는 장면에서 나온 생년월일이 실제 저자의 생년월일과 동일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수유리 지역을 배경으로 쓴 것도 실제 저자가 거주했던 곳이기에 그와 관련된 좀 더 세세한 묘사가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온 강 선생님 책 읽어보셨지요?
예, 읽었어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사실,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책과 얼마나 차별화되는가 하는 거예요.
나는 신중하게 대답한다.
.......그 책을 반박하기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P319
달은 기계적으로 반듯하게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지 않는다. 수없이 흔들리며 뒷면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때문에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은 50퍼센트가 아니라 59퍼센트다. 흔들리며 드러난 약간의 뒷모습을 따라 9퍼센트의 불완전한 지도를 그려갈 수 있다.- P320
사십 년 전의 눈 덮인 미시령을,
캄캄한 앞유리를 향해 어둠이 뱉어낸 침 같은 눈발들을 생각한다.- P321
내 짐작은 틀렸다.

인주가 류인섭을 찾아간 11월 12일은 작년이 아니라 이년전 11월 12일이었다. 인주의 마지막 개인전이 열리기 약 한 달 전, 「달의 뒷면」연작 여섯 점을 몰아치듯 그리기 직전이었다. 정선규가 민서를 돌려준 뒤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P321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P324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숴야 하는 것 같아.- P324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숴야 하는 거야.- P324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P324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P324
날마다 가차 없이 낡은 것을 부서뜨리고 새로 세우는 이 도시에서, 거기 남아 있는 흔적은 얼마나 될까.- P325
알 수 없다.

류인섭의 피투성이 고백이 그 적막한 그림들을 불러낸 까닭을 알 수 없다.
그 그림들의 첫 제목이 미시령이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P328
류인섭이 말한 대로일지도 모른다.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퍼즐 조각을 합한다 해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고스란히 남게 될지도 모른다.- P328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밤새워 창틀 사이로 파고들던 그 집은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던 그 시간은 없다. 그림 없이, 삼촌 없이, 오후의 산책과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감자 소반 없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던 시간은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이 주먹질하듯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시간, 힘껏 부릅뜬 내 눈을 통과해 흩어지던 시간은 없다.- P329
.......우주공간을 적외선 촬영하면, 빅뱅의 흔적으로 남은 배경복사를 우주의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은 점들의 형상으로 볼 수 있어. 절대온도 300도의 무수한 빛점들. 사실은 차갑지만 더 차가운 우주공간의 온도에 비하면 뜨겁다고도 할 수 있지. 우주가 유한하고 굴곡진 다면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 빛점들의 형태와 무늬를 연구해 평생을 바쳐서 가설을 세우고 천체망원경에 매달리지. 그 점들의 형상이 퍼즐처럼 이어 맞춰지는 부분을 우주공간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거야. ......오직 그것만이, 거대한 전체 우주의 형상을 그려낼 결정적인 단서가 될 테니까.- P330
숨을 쉬기 어려울 때마다 삼촌의 방을 생각했다. 내가 그은 먹선들을. 얼음바위 아래 핀 붉은 꽃들을, 부드럽고 끈덕진 침묵을 생각했다. 불타는 별들을, 쓰디쓴 약냄새를, 부끄럽도록 커다랗게 들리던 두 사람의 숨소리를 생각했다.- P332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인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속력이 다른 세계 속에서 인주는 살았다. 달렸고, 높은 휘파람을 불었고, 덤블링을 했다. 사소한 일에 큰 소리로 오래 웃었고, 선선히 타인을 받아들였다. 그 시절 이후로 인주의 속력은 눈에 띄게 누그러졌지만, 사람을 대하는 그 자세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그득 채운 뒤 흘러 넘친 빚을 누구에게든 흔쾌히 내밀었고, 결코 여분을 걱정하지 않았다.- P332
언제부터 저 두 눈에서 파르스름한 불이 타기 시작했을까.- P334
.......꼭 죽여야 한다면 내가 죽일게, 네가 죽는 건 싫으니까.- P335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 P336
어떤 관계는 고인 물처럼 시간과 함께 썩어간다는 것을, 거기 몸을 담근 사람까지 서서히 썩어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소유와 의존, 집착과 연민, 쾌락과 무감각과 환멸, 한줌의 간절한 진실이 한무더기의 뱀들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얽히는 동안, 땅 밑에서 하나씩 뿌리가 문드러져가는 나무처럼 어깨가 굽고 목소리가 잦아들어 가리라는 것을 몰랐다. 마침내 아들과 아내를 버린 K가 나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삼 년이 가장 나빴다.- P336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나니?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라고 했잖아.
반쯤 웃으며 인주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렇게 너를 그냥 외워볼게. 대신 시간을 좀 줘.- P337
이런 이야기를 넌 이해하지 못하지.
나약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P339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P340
내 몸속에 날카로운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점점 더 날카로워지다가 어느 순간 바스라질 것이다. 자신이 가장 예리하게 벼려진 순간 사라지는 칼날처럼.- P341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P343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P344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P346
눈비를 부르는 습기 찬 바람이 조용히 일고 있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뒤섞는 바람.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을 뒤섞는 바람.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온몸의 실핏줄들을 서서히 부풀리는 바람.- P347
당신의 집요함에는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서인가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훼손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하나, 당신의 불안정한 정신뿐인데 말입니다.- P350
어지럽게 찍힌 흙발자국들을 따라가 책상 앞에 선다.
편지들을 보관하는 서랍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의 편지들이 모조리 끄집어내져 바닥에 널려 있다. 따로 맨 앞에 두었던 인주의 편지들은 사라지고 없다. 김영신이 준 봉투에서는 편지를 빼가고 은가락지만 남겨두었다.- P351
그는 류인섭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류인섭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여기서였다.
그래서 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P352
마지막까지 만나려고 망설였던 사람입니까.
강석원이 어둠 속에서 뱉어낸 말을 나는 곱씹는다.- P352
인주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고, 책을 읽다가 여백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삼촌의 그림에 대한 생각을 어딘가에 밝혀두지 않았을까.- P353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김영신이 그랬듯이,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를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너무 쉽게, 급하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던가.- P353
그는 미쳤고 동시에 미치지 않았다. 내가 미쳤고 미치지 않은 것처럼. 어떤 생각의 소용돌이가 그의 행위로 이어지는지 추측해내야 한다. 그의 분노, 그의 헌신, 그의 집중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야한다. 그러려면 그가 되어야 한다.- P354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 그 사람은 십삼 개월 된 민서를 업고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나를 위협했습니다. 아무리 아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해도 결코 어미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어미로서의 자격을 잃었던 것입니다. 여섯살이 된 민서를 내가 강제로라도 데려온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아이의 건강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애타게 어미를 찾지 않았다면 다시 양육권을 포기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P356
언제나 그 사람의 방식은 그렇게 극단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으로 인해, 더는 누구로부터도 비난받고 싶지 않습니다.- P357
창밖의 나무들은 아직 죽어 있다.
검고 두꺼운 저 껍질들 아래 수액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다시 봄이 되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죽은 것들을 뚫고 산 것이, 딱딱한 것들을 뚫고 부드러운 것이 치밀어 오르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P358
아파트 10층의 난간을 붙잡고 소리치는 인주의 얼굴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인주의 등에 업혀 있었을 어린 민서의 얼굴이 서늘하게 눈을 가린다.- P358
아니,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여러 겹의 침착함과 강인함을, 몸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P358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건가.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흔들림으로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뒷면인가.- P359
내가 잠들어 있었을 때.
진동으로 맞춰놓은 휴대폰 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을 때.- P360
왜 당신의 친구가 나를 찾았느냐고 나에게 묻는 겁니까.

그 사람 안에도 어머니와 같은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P362
그가 인주와 함께 있었다.

인주를 차 속에 버려두고, 혼자서 사투를 벌여 미시령을 넘어갔다.

그가 인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 역시 인근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흔적을 그날 새벽 내린 폭설이 덮었다.- P365
고개를 든다. 바람의 온도와 습도를, 방향과 속력을 어림한다. 영상 3도쯤, 습도는 90퍼센트에 가깝다. 풍속은 초속 2미터쯤이다. 지금 내가 들이마셨다 내쉰 공기의 입자들은 한 시간 뒤면 8킬로미터 남쪽으로 날아가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 인주는 대체로 말이 없었다.- P367
꼭 이만큼의 바람 때문에, 장대가 뒤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 기울었어.
그날의 일을 인주의 목소리로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억울하지 않았어. 내가 바를 넘지 못해서였어. 바를 넘었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었다 해도 장대는 나를 찌를 수 없었어.- P367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P367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민서를 고쳐 업으며 인주는 말했다.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P369
화학섬유 재질의 부드럽지 않은, 흡습성이 좋은 담요가 필요하다.
보통의 담요는 먹을 빨아들이지 않아 그림을 통째로 망쳐버린다.
벌써 석 장째 실패했다.- P370
왜, 어디로 인주의 물건들을 옮겼나.
왜 그날 내가 보지 못한 것들만 남아 있을까.-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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