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인 서인주의 죽음으로 인해 그간 인주의 행적을 찾아헤매던 이정희는 인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심리 상담소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간의 이야기의 흐름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갑자기 좀 생뚱맞긴 한데, 상담소장이 이정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좀 의아했다. 물론 남녀사이에 이성적인 끌림이야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맥락없이 처음 본 사람한테 강렬한 이성적인 끌림이 생겨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의구심은 뒤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되긴 했다. 물론 아직 다 읽은 건 아니라서 약간의 의구심은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상담소장은 과거 대학생이던 시절 진수라는 이름을 가진 고위층의 자제에게 영어 과외를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수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여자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동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읽으면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이 나오는 관계로 독자인 나는 인물들이 새롭게 나올때마다 그들의 이름이나 다른 인물들간의 관계도, 개개인의 인적 특이사항 등을 별도의 메모지에 적어가면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이 이미 한참 전에 그 메모지에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선은 서인주의 어머니라고 내가 적어놓았던 메모를 보면서, 이게 연결고리가 되어 상담소장과 이정희 간에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겠다는 예상을 해볼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동선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그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각종 유명한 교향곡들을 즐겨 듣거나 혹은 자신이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릴정도였다고 한다.
과외학생인 진수를 매개로 서로 알게된 인섭과 이동선은 조금씩 처음의 서먹서먹함을 깨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인섭은 아버지가 사회 고위층이라 집안 형편이 좋은 진수의 집에 있는 최고급 음악 관련 장비들을 보고 진수에게 제안을 하여 그 집에서 수학 과외선생님인 이동선과 함께 음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제안을 한다. 때마침 진수도 수학 과외선생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던 터라, 진수는 인섭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 조성된 뒤 셋이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인섭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 것인데, 단지 몇 마디 말로는 다 나타내기 힘든 음악이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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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좀 더 읽다보니 처음에 좋아보였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한다. 물론 이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화자인 인섭의 말로 인해 어느정도 예상됐던 것이기도 한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기도 했고 작은 꽃(?)이라도 피울 줄 알았던 로맨스도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전개상 로맨스적인 요소가 잠깐이나마 나왔다는 거 자체가 어쩌면 신기한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어 왔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소설 속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얼핏보면 이동선의 동생이 몸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동생을 진료하러 온 의사에 대한 인섭의 질투심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여기서 하나 더 추가로 언급하자면 위에서 내가 이동선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인섭의 질투심을 유발한 사람이 의사라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소설의 앞부분을 읽을 때 적어놓았던 인물들의 특이사항 중에서 서인주의 아버지 직업을 의사라고 적어놓은 메모를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기에 이를 통해 결국 이동선과 이 의사라는 사람이 후에 결혼을 하여 서인주를 자녀로 낳았음을 합리적인 근거로 추론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추론을 통해 엄청 먼 곳에 떨어져 있던 퍼즐을 찾아서 맞춰 끼운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내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일절의 메모없이 이 부분을 읽었다면 이러한 짜릿함은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집착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집착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집착하는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집착은 궁극적으로 인섭이나 진수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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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이어 읽다보니 이동선이 과거에 겪었던 위험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 별도로 자세하게 밑줄치진 않았지만 독자인 나는 이 부분에서 ‘미시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령은 이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서인주의 메모에 적혀있던 것인데, 이를 통해 조금씩 베일에 쌓여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인섭과 이동선 그리고 진수 이 세 사람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무작정 차를 몰고 미시령으로 간다. 눈발이 매섭게 몰아치는 영하 20도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술 기운에 충동적으로 움직인 듯하다. 여기 자세히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막장 드라마(?)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막장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 될 지 지금으로선 딱히 감이 오질 않는다. 물론 큰 틀에서는 아마도 서인주와 관련된 이야기로 어쨌든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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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미시령에서 돌아오면서 차를 몰고 미친듯이 미시령으로 갔던 일은 이제 그냥 단순한 일탈 정도로 마무리 되는 줄 알았는데 상황이 갑자기 급변한다. 질투심에 휩싸였던 진수가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의 화자인 인섭도 질투심에 휩싸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다. 근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진수가 이동선의 남자친구라고 알려진 레지던트 의사를 차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 의사는 즉사했고, 진수는 이성을 잃고 의사가 근무하던 병원 외벽을 다시 들이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화자인 인섭은 몇 일간 악몽같은 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후에 더 황당한 것은 진수가 고위층의 자제여서 그랬는지 진수의 잘못을 화자인 인섭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본문에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도 운전자 바꿔치기를 통해 모든 행위를 인섭에게 엎어 씌운 것으로 보인다. 인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형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권력의 폐혜가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인섭이었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에 휩싸였을 것 같다. 차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분노일 것이다.
완전하게 집중한 상태에서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내면이 겪는 것들을 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날 그 음악 속에서 우리가 겪은 것 역시, 결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태로울 만큼의 집중력으로 그녀가 음악을 빨아들이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P281
그러나 그보다 위태해 보인 것은 진수의 반응이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만 가능할, 비뚤어진 조숙함 때문에 더욱 강해졌을 집중력으로, 진수는 음악과 그녀를 동시에 빨아들였습니다. 그녀의 진지함, 그녀의 나약함, 지각처럼 단단한 슬픔 아래 숨겨진 관능까지.- P281
다음은 언제지, 라고 그녀는 진수에게 물었습니다. 부활의 5악장, 격정적인 구원의 혼성합창이, 그 격정을 손상시키지 않는 뜨거운 기악 코다가 아직 공기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던 살얼음이 완전히 녹아 눈시울에 따스하게 고인 눈으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한 듯, 모든 것들로부터 용서받은 듯 고요하게.
다음 주 금요일. 이 시간이요.
서툴러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제하는 어른 남자의 음성으로 진수가 대답했습니다.- P281
눈에 띄게 명랑해진 가정부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금요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차츰 세 사람은 서로의 감정 속으로 들어갔고, 예민한 지진계처럼 서로의 균열을 읽었습니다. 한마디 말없이 눈짓으로 말하는 삼중주단처럼 서로의 고통의 회로를 익혀갔고, 그렇게 발견한 어떤 감정의 비밀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P282
마치 세계 전부가 나를 조롱하며 침을 뱉는 듯 크라이슬러의 앞유리에 뭉클뭉클 몸을 으깨던 물기 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P282
내 뺨과 그녀의 손이 하나의 영원히 따스한 덩어리로 느껴진 순간, 그것이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 P282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진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일요일 오후를 기다려 집으로 찾아간 나를, 갑자기 대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P283
안 돼. 지금......
독을 뱉거나 삼키듯이, 화살을 쏘거나 스스로에게 겨누듯이 그녀는 힘주어 말을 맺었습니다.
의사가 와 있어.
그 한마디가 일깨운 내 몸속의 지옥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P283
나는 집착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그녀와 나를 동시에 학대했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학교 앞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마치 군인처럼, 정보요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여자처럼.- P283
배신감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레지던트와 그녀가 단둘이서 나누고 있으리라고 내가 순간순간 상상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원한에 가까운 갈망ㅡ그녀의 육체에 대한 정직한 갈망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종의 광기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P283
눈짓으로 말하던 삼중주단은 깨어졌습니다. ...(중략)... 나는 갈망과 절망을 조금도 숨길 수 없는 상태였고, 진수 역시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P284
금방이라도 책상을 내리칠 듯한 녀석의 깡마른 주먹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짐작하고ㅡ이해하고ㅡ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그녀가 녀석에게 상상 속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그를 버린 젊은 어머니, 버려진 유년, 따스한 것, 빛나는 것, 눈물, 욕정, 구원, 누더기를 입은 천사였다는 것을.- P284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내 눈과 허공에서 만난 순간, 세차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녀의 눈 때문이었습니다. 군인의 눈도, 정보요원의 눈도 아닌, 다만 혼란을 느끼는 눈. 외면하지 않는 눈.- P287
그 레지던트는 나보다 나은 사람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녀가 술을 끊도록 하는 것은 내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막상 그녀가 술을 끊었다고 말하자 나는 찌르는 것 같은 패배감과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P287
흔들고 싶었습니다.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P287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알코올중독에 대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잔이면 충분했습니다. 단 한 모금의 방심이면 되었습니다.- P288
마침내 그녀가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취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느슨하고 쓸쓸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P288
너는 결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지 않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극복했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를 이겼다.- P289
이 모든 것을 너는 잃었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이기지 못한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에게 패배한다.- P290
이런 음악은 말이야. 사실은 가짜야.
...(중략)...
언제나 시작은 정직하지. 인간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직시해. 그런데 그 절망으로부터 이런 5악장에 이르는 과정은 말이지...... 순수하게 음악적인 거야. 삶의 힘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힘으로 밀고 가는거야. 차라리 저 가사를, 내가 했던 것처럼 모두 거꾸로 했더라면...... 가혹함만으로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P290
왜 술을 마시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중략)...
불안 때문이야...... 불안을 알아? 진짜 불안이 뭔지 알아? 돈. 빌어먹을 추위. 가망 없는 그 애의 병. 내가 인간이라는 거. 이 모든 걸, 빌어먹을 누구와도 나눠서 짐 질 수 없다는 거.- P291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부었습니다.- P291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거기야.
...(중략)...
・・・・・・ 아니,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데가 거기야.- P292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가 죽는 바로 그날까지…………… 그날의 기억은 내 지옥이었어.- P293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돼.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P293
이걸 더 마셔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점심 무렵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P295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탄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로 신이 태어난 날. 그 통로로 단 한 번 하늘과 땅이 연결된 날,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실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P296
막막한 경탄과 공포 사이에서 몸이 떨려왔습니다. 마치 내 몸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격렬하게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무너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P300
하늘과 땅이 한몸의 서늘한 육체가 되어 펄펄 흩날렸던 기적ㅡ재앙ㅡ은 끝났습니다.- P302
추위보다, 공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상상력이었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을 ㅡ 그토록 뻔한 신파의 내막을 ㅡ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지옥이 지금의 지옥보다 나은 것이었습니다. 눈꺼풀 속에서 조용히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만취한 그녀를 임신시키는 남자의 이미지는 좀 전에 보았던 진수의 행위와, 절망적인 나의 수음 속에서 이루어졌던 숱한 상상의 세부사항들과 뒤섞여, 악마의 꼬챙이처럼 내 눈을 찌르고 꿰었습니다.- P302
내 고통은 생명을 가진 짐승처럼 밤새워 나를 파먹어갔습니다. 그녀의 숨소리와 살 냄새, 옷 스치는 소리가 회칼처럼 내 몸을 가르고 살을 발랐습니다.- P303
왜 날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라고 항의하듯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눈 속에서, 사이좋게 저 여자의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 의사 새끼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수없이 꿈꿨던 진짜 악마가 되고,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는 공범이 되고, 사이좋게 그 새끼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우리는………- P304
남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어, 라고 문득 운전석에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된 거라고. 기억들은 모두 잊으면 되는 거라고.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자기 위안이었는지 깨닫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D병원 현관 앞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고 눈살을 찌푸린, 이 세상 모든 모범생들의 얼굴을 합해놓은 것 같은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구역질이 났고, 목구멍이 터질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P304
굉음에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고, 흰 옷 입은 남자는 이미 절명했고, 진수는 한 번 더 전속력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병원 외벽에 차체를 들이받았습니다.- P305
어떤 죄도, 혐의도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악몽만이 내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이불 속에 웅크려 보낸 며칠 동안, 나는 그 흰옷 입은 남자를 절명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앞범퍼를 병원 외벽에 들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쳐져 휘청거리는 버스에서, 출구를 향해 기어가는 계집아이를 밀치고 뛰어내린 사람이었습니다.- P306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성북동 집 앞에서 진수의 아버지를 보았을 뿐, 나는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범인에서 목격자로 뒤바뀐 진수의 증언 역시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포함한 어떤 증인도 출석하지 않은 텅 빈 법정에서 나는 자술서의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단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후진하려던 것이 그만 앞으로 차를 몰게 된 것이라고, 누군가를 죽일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고 끝까지 주장해 형량을 줄였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 순간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P306
하룻밤의 광기와 맞바꿔야 했던 수형 생활의 기억 따위는 당신에게 의미 없는 것이겠지요. 이런 고백은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이겠지요. 그 시절, 닳지 않는 샘처럼 내가 꺼내 마신 기억이 어리석게도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P307
.....설령 애정을 가지기 어려운 내담자였다 해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상담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일일이 복기하며, 끈질기게 반복되는 자책에 사로잡혀 수개월을 보낸 뒤에야 다음 상담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그것이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309
그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앓았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질 무렵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38도 내외의 발열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감쪽같이 덮어두었다고 믿었던 무력감과 억울함, 죄의식과 혼란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명치를 짓눌렀습니다.- P309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오 년 가까운 시간을 감옥에서 견뎠다고. 마음으로 저지른 죄까지 모두 치러낸 셈이 되었다고.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것을 이해한다고. 다만 아직 내가 살아 있고, 그동안 당신 역시 살아내주어서 다행이라고.- P310
대문까지 따라나온 그녀의 동생에게 나는 이름과 집 주소, 직장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P310
이제 짐작하겠습니까.
당신의 친구는 그 메모를 간직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잠깐 보았을 뿐인 그 이상한 손님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유일한 사람, 나를 추적해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P311
왜냐구요.
이것은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과 직접 연결되는 대답이겠지요.
자신의 어머니가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당신의 친구는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의 끔찍한 표현에 따르면, 감염된 환부처럼, 죽은 짐승의 육체처럼 서서히 썩어가기를 스스로 택했던 이유를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P311
왜냐구요.
바로 자신 안에 그런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P312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나를 견디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똑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그녀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P312
아직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첫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요한 음악이, 운석과 운석 사이의 침묵처럼 희박해지며 끝나가고 있습니다.- P312
유년 시절에 경험한 형제들의 죽음 때문에 말러는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노래‘ 연작을 썼습니다. 그것이 저주처럼 자신의 어린 딸의 죽음을 불러오리라고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겠지요. 마지막 심장 발작을 앞두고 교향곡 9번의 4악장을 쓰며, 옛 연작 중 한 곡의 선율을 빌려 그는 독백합니다. 아이들은 산책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성글게 잦아드는 눈발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선율입니다.- P312
오래전 그녀가 음악을 들었던 방식으로 바꿔 들으면, 거기 숨겨진 진실은 이제 그가 산책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고백입니다. 어스름 속의 후회, 잔혹하게 몸을 으깨는 진눈깨비, 핏기 잃은 질문들, 무한히 시간이 느려지는 밤 속에서 더 찢기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산책 나갔고,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P313
허락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ㅡ당신의 친구에게 똑같이 던지고 싶었던 조언을 당신에게 해도 될까요. 아니, 허락 따위는 구하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P314
이제 나는 어리석은 산책길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 때문도, 당신의 친구 때문도, 그렇다고 당신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오랫동안 지쳐왔을 뿐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