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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지금 읽는 부분에서는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임선주라는 사람이 화자가 되어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선주는 5월 당시 동료들과 함께 시민군의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인데, 시신을 수습할 당시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시신을 태극기로 감쌌다고 한다.

당시 선주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인 동호와 은숙은 국가가 군인들을 시켜서 시민군을 죽였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로 시민군의 시신을 덮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은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것인데 독자인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동호와 은숙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민군을 죽인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시민군의 시신에 덮는다는 행위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당시를 다시금 떠올린 선주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그저 도륙된 고깃덩어리로만 남을 뿐이다)는 생각때문에 시민군의 시신들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한다.

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 나왔던 문장 중에 ‘우리는 고귀해‘ 라는 것이 있었다. 이 말은 과거 선주와 함께 일했던 김성희라는 사람이 자주 했던 말인데, 독자인 나는 위에서 언급한 태극기를 시신위에 덮어주었던 선주의 행동도 어쩌면 ‘우리는 고귀해‘ 라는 김성희의 말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귀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하는 것이 ‘우리는 고귀해‘라는 생각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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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6번째 파트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동호의 엄마가 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수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군인들의 총칼에 짓밟힌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잔혹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갑절로 먹먹해졌던 것 같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P173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174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P174
만일 혼들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어두울까, 어렴풋이 밝을까.- P175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 P175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P182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P183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P185
그라제,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면 큰 죄를 받제.- P187
그 고운 처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빨래 바구니를 보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하고 칫솔을 들고 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일이 무신 전생의 꿈 같아야.- P187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P187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P188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P188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P189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P189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도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P189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P190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P190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P200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P203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P203
입속이 타들어가던 한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P204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P205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지만 기다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기다린다.- P205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무엇이 된 것처럼.- P206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P206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P207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P207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P211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P212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P213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P213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P213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P213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P213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P214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P215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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