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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미술 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강석원이 사망한 서인주에 대해 자신만의 왜곡된 관점으로 쓴 평전을 내려고하자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서인주의 자식인 민서에게 악영향이 갈 것을 우려하여 그 평전의 출간을 막기위해 사방팔방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인주에 관해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정희는 친구인 서인주가 예전에 그림을 전시했다던 명 화랑의 관장인 명은숙을 만난다. 명은숙은 그간 자신의 화랑에서 있었던 서인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준다. 인주는 처음엔 그닥 유명세가 없었으나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시를 통해 유명세가 생겼고 이후에 상업 화랑들이 인주에게 달려들면서 나중에는 명 화랑보다 규모가 좀 더 큰 대형 화랑인 P화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던 인주의 상황상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P화랑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명은숙은 회고한다.

근데 아무래도 P화랑은 대형 상업 화랑이다보니 조금만 성과가 안보인다 싶으면 가차없이 내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자신만의 색깔이 강했던 인주가 결과적으로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면서 괴로워했을거라는 게 명은숙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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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정희가 수소문끝에 만난 사람은 인주가 과거에 일했던 미술학원의 원장인 주승우였다. 그는 인주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었다며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기에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한편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서인주와 관련하여 만나달라는 이정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는 소설 속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상관없거나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런 건 어쩌면 소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각박한 모습과도 일정부분 닮아 보인다.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이정희의 수소문과는 별개로 강석원이 결국 서인주에 관한 평전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그 책에 정확히 어떤 내용이 나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정희의 입장에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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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7장 ‘얼음 화산‘ 이라는 챕터로 넘어가는데 여기선 김영신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나온다. 근데 실은 엄밀히 말하면 새롭게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게, 위에서 언급했던 이정희의 수소문 과정에서 김영신의 이름이 아주 잠깐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때는 서인주에 대한 얘기를 부탁했던 이정희와의 만남을 단칼에 거절했었기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물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7장에서 김영신이 이야기 속의 핵심 인물로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며, 소설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서인주 씨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게 그 시리즈는 아니었을거란 거죠. 가슴에 불이 타는 사람인데, 그냥 불이 아니라 시커먼 불이 타는데, 그렇게 고요한 숲 그림은 어쩌다 한 번, 문득 마음이 고요할 때 나오는 거지. 그래서 죽은 것 아닐까 싶어요. 자기 안에서 뭐랄까, 분열이 싹튼 거겠죠.- P203
《미술정신》에 실린 작품은 흥미롭게 봤어요. 도판만 봐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이미지 자체는 괜찮더군요. 문제는 빨리 자기 작업을 브랜드로 만들어서 팔아야 살아남는 게 이 바닥인데, 구상하다 비구상하다, 난데없이 한지에 먹으로 재료를 바꾸고…………… P화랑에선 좋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쪽 사람들, 작가들 피를 말리는 걸로 유명해요. 시간을 안 주죠.- P204
강석원 교수를 만나봤지요? 서 작가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인터뷰했다던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고인을 생각해서저도 인터뷰에 응했어요. 저희로선 강 교수한테 섭섭한 게 많아요. P화랑 대표를 서 작가한테 소개시켜준 장본인이니까. 지금 유고전을 기획하는 모양인데, 물론 일이 이렇게 됐으니 P화랑이랑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희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제할 순 없는 거예요.- P204
가난, 빌어먹을 가난이 죄지. 홍콩에서 경매로 그림 몇 점 판 돈이면 다 메우고 꿰매고, 팔자 고칠 수 있는 가난.- P208
말도 안 되지. 서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P208
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P211
이 책을 펼치고 싶지 않아.
펼치는 순간 책장들이 부스러질 것 같아. 손가락에 엉기며 녹아내릴것 같아. 촛농처럼 끓어오를 것 같아.- P211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P212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P212
허점이 드러날 만한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P213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 박힌 책을 읽었다.- P213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면이 언제나 같은 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운석들과 충돌해 수두를 앓은 흉터 같아진 뒷면은, 오직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관측할 수 있다.- P218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서인주라는 사람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위대함의 씨앗을 가진 예술가였고, 주변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자연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우리를 둘러싼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의 뒷면을 보지 못했다. 수없이 부서지고 파인 자국들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P218
그녀는 작업실의 달력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P219
알고 있다. 로베르 르파주의 일인극 「달의 저편」의 대사처럼, 그녀의 미술관을 지어야 할 진실한 장소는 오직 달의 뒷면뿐이다. 우리들의 시선으로 더럽혀지지 않을 시시각각 충돌해오는 운석들과 맞서 부서지기를 택해야 할 그 고요한 곳......- P219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인주가 달력에 쓴 것은 내가 쓴 대사였다.
십일 년 전 공연되었던, 모두에게서 잊혀진 연극의 무대에서, 이제는 퇴역 배우가 된 여주인공은 객석을 향해 독백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P219
컴퓨터 책상 위에 걸린 4호 크기의 액자에 담긴 것은, 얼음에 덮인 미시령의 흑백사진이었다.- P226
어린 지구는 처음에 마그마가 일렁이는 붉은 얼굴이었다가, 수천만년 동안 펄펄 끓는 비를 맞고서 파란 얼굴이 되었고...... 빙하에 덮이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가, 그 얼음이 녹아서 바다가 되면 다시 파랗게 되기를 반복했겠지.- P228
궁금해.
지구가 가장 차가웠을 때, 가장 선명한 흰빛의 얼음덩어리였을 때, 그 위로 눈이 내리는 건 어떤 모습이었을까.- P228
버려진 것들을 좋아해요. 지금 앉은 소파, 걸상도 주워온 거예요.- P230
고래는 한번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멎지 않는다고. 워낙 덩치가 커서 바로 안 죽는 것뿐이지, 결국은 죽고 만다고.- P232
천천히 아랫입술을 씹다가, 뱉듯이 짧게 그녀는 말했다.
......상처받았지.- P233
어리석지 않아요? 저것들을 깎느라 나무 열두 그루를 끝장내다니. 마티카라고, 두 팔로도 다 못 안는 인도네시아 활엽순데...... 열두그루면 숲이라고 불러야겠죠. 그것들을 다 베어 죽이고, 나는 늙고..... 하나뿐인 친구였던 사람은 날 버리고.- P233
무엇인가에 복수하는 것 같은, 복수하며 스스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전기톱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P234
지워지지 않고 나는 끝까지 걸었다.- P237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P240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김영신은 인주의 과거의 많은 부분을 나보다 더 알고 있다. 강석원을 십분 만에 돌려보낸 것은, 그와 인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 편지와 가락지를 준 것 역시, 충분히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241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P241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무엇을 생각한다는 걸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무엇을 숨길 것인가를?- P245
「닥쳐」는 무대에 올라간 내 첫 희곡이었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은밀히 학대받았던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지배당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남자를 만나 그가 제안한 ‘닥쳐‘ 게임을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닥쳐‘라고 응수하는 것이 그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다.- P246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말한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P248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삼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P251
둘 다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자살한 동시에 자살하지 않은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버리지 않았을 수는 없다.
갓길 없는 미시령의 눈 쌓인 길에서, 벼랑의 안쪽과 바깥쪽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 한순간, 둘 다를 택할 수는 없다.
주저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 P256
인주가 재현한 삼촌의 별이 한 면 가득 태어나고 있다. 희고 뜨겁고 타오르는 것, 둥근 불꽃의 적막이 캄캄한 피 같은 먹 속으로 번진다.- P256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방금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시간여 전에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직업적인 습관일까. 변명일까. 진심일까.- P258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P259
넉 줄짜리 사회면 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름을 일 년 뒤 조간신문에서 보았을 때, 아무도 내 기도 따위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둔하고 느린 동작으로 신문을 접어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무너지기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몸 어디에서건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를. 피 흐르지 않았습니다.- P260
그날 당신이 꺼내놓은 추측들은 모두 틀렸지만, 이 사진을 내가 직접 찍었으리라는 짐작만은 옳았습니다. 오래전, 내가 그곳에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을 후회해왔습니다. 사진을 없애는 것으로 그곳을 잊을 수 있었다면 수십 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시시로 그곳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김에 덮인 거울 속의 사람처럼 내 인생은 지워지고 흘러내렸을 겁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거울 속의 그 사람이 이제 힘차게 흘러내려 지워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P261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장소였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그녀의 죽음의 장소가 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고쳐 물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떨리고, 열기 띤 눈이 세차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합한다 해도, 결국은 순수한 추측만으로 메워야 하는 빈 곳이 남지 않겠느냐고.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 책과 다름없이.- P261
처음 태어난 우주는 너무 작고 밀도가 높아 빛조차도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우주가 팽창하면서 간신히 활동할 수 있게 된 빛은 엄청난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고, 그 파동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채 온 우주에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주 어느곳에나 균일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빅뱅의 증거, 모든 것이 처음에는 하나였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전화의 잡음 중에 그 우주 복사로 인한 것이 있다고, 처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사막에서 전신주를 수리하던 사람들이었다고도 했습니다.- P262
우주가 무한하지 않다면, 빛의 속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시각의 힘으로 닿을 수 있는 먼 과거의 우주가 언젠가는 보일 거예요. 가깝게는 빙하기의 지구를 볼 수 있고, 지구가 태어나기 전의 어둠도 볼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풍경을, 먼 미래의 다른 별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을거예요. 우주가 유한하고 거대한 입방형의 덩어리라면, 움푹 파이고 휘어진 채 팽창하는 공간 어딘가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P262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인주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P263
사십 년 전, 삼십 년 전, 이 년 전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듯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P264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잔인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당신이 입을 틀어막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가혹하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쓸 그 불가능한 책을 연민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 편지를 남김 없이, 삼킬 듯이 읽어가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 속에서 당신의 입술, 혼란 때문에 벌어진 입술에 내 입술을 문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 어리석고 병적인 그 상상이 나를 위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위악적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를, 어깨가 굽고 머리가 희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265
그렇습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친구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힘겹게 맞춰온 퍼즐의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나를 죽여왔고, 이제 새벽이 되기 전에 나를 죽인 뒤 가까스로 끝날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총명한 눈, 방금 살얼음이 녹은 것처럼 젖어 있던 눈, 누구도 차마 오래 맞받아 바라볼 수 없었던 눈에서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P265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P265
내 옆으로 두 발짝 떨어져 앉은 그녀는 허밍으로 말러 2번 교향곡의 선율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취한 사람 특유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도취 속에서 그녀는 설명했습니다. 1악장의 회로가 얼마나 복잡하고 극적인지. 그것을 종결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묘한지. 삶과의 춤을 그린 2악장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세속적인지. 반면에 죽음과의 무도인 3악장에 어려 있는 씁쓸한 유머에 대해서. 그리고 4분55초의 알토 독창으로 처리한 ‘처음의 빛‘이라는 제목의 4악장. 그 견결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P274
오, 붉은 장미여

인간은 거대한 가난 속에 있네.
인간은 거대한 고통 속에 있네.
차라리 나는 천국에 가서 머물고 싶네.

마침내 나는 널따란 길에 다다랐네.
한 천사가 그 길을 막고 나를 돌려보내려 하네.
아, 안돼.
나를 돌려보내지 말아줘.

나는 신에게서 왔으니 신에게로 돌아가려네.
사랑의 신은 나에게 빛을 비추겠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P275
그 노래의 마지막 단어, 리베ㅡ생명ㅡ를 부르던 그녀의 떨리는 가성을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음반을 찾아서 들어보았지만, 사십년 전 그녀의 부엌에서 들었던 만큼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가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발음하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오직 절망과 갈망만으로 다다르려 하는,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아 천사에게 애원할만큼의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그렇게 열병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P275
오토 클렘페러네요. 브루너 발터가 지휘한 것 나한테 있는데. 말러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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