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과학 분야 중에서도 물리학에 나올법한 내용이 하나 나온다. 내가 과학 분야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그 명칭을 확언할 수 없으나, 뒤에 나오는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자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쪽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관찰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과학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의 깊이가 좀 더 깊었더라면 읽자마자 직관적으로 이해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게 살짝 아쉬웠다. 어쩌면 이러한 아쉬움은 과학 분야의 책을 좀 더 읽어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 소설에 나온 물리학 개념과 관련하여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은 바로 내가 개인적으로 읽다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엔드오브타임》이다. 물론 인터넷 검색창이나 챗GPT같은 AI 플랫폼에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지만, 물리학과 관련된 전반적인 큰 흐름을 살펴보는데는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단은 당장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AI플랫폼을 활용하고, 이후에 물리학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면서 큰 흐름을 잡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모든 사물의 운동 속도는 예외 없이ㅡ정지한 사물조차도ㅡ빛의 속도와 일치한다고 나는 읽었다.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와 시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합하면 일정하게 빛의 속도가 된다. 즉, 공간 속에서 빠르게 운동할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광속에 가깝게 비행하는 우주선을 탄 사람은 늙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 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P80
이따금,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와 똑같이 멈춰 있는 보도블록들, 나무와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흐르는 시간 속을 날아가고 있구나. 순수한 시간의 속력을 견디고 있구나.- P80
그렇게 기다린다.
파고드는 발목의 통증, 추위, 달아난 잠 대신 밀려드는 허기, 타들어오는 갈증 속에서 빛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있다.- P81
한지에 먹을 입히기 시작한 첫 순간 이후, 삼촌의 생활은 잠시도 그 그림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날씨에 극도로 민감했는데, 기압과 습도에 따라 물과 먹이 번져가는 양상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마른다는 것은 모세관 현상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을. 그림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 됐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수시로 그림의 물기를 확인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에 물을 더 뿌려줘야 했다. 더 힘 있게 번져가도록 할 부분과 얼마 안 있어 멈춰야 할 부분을 택해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다.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물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시각적 예민함 이상의 감각이 필요했다. 먹의 감각, 종이의 감각, 물과 공기의 감각,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이 필요했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도 그것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P84
이 방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그 의문들을 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복잡한 의문들이 가지를 뻗어갈 줄은 몰랐다.- P85
지금 저 그림들을 느슨히 묶어놓은 솜씨는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다. 누군가가 일일이 풀어서 그림들을 펼쳐본 것이다. 알고 있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무방비 상태로 저런 일을 당한다. 심지어 육체가 부검당하기도 한다.- P86
입술을 다문 채 나는 서 있다. 어떤 분노는 이렇게 지속된다. 혼란과 무력감, 고통을 연료로 밑불처럼 낮게 탄다. 머리를 뜨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한다.- P86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P88
같게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네 얼굴인걸.- P88
존 애덤스가 피아졸라의 음악을 평하며 네루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 향기의 오줌 냄새를 맡는, 음식 자국과 피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증오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의 음악이라고.
그 말을 그대로 서인주의 그림에 적용할 수 있다.- P89
짙은 색의 크레용을 격렬하게 겹쳐 칠해 거의 검어져버린 화면 속에서, 욕망 없이 벌거벗은 몸들이 칼자국처럼, 깊은 흉터처럼 꿈틀거린다. 성별도, 나이도 분명치 않은 사람들의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수직 또는 수평으로, 때로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몸을 뻗고 구부려 마침내 그들이 다다르려하는 곳은 어떤 심연의 수심인가.- P90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P94
1밀리미터 두께도 안 되는 한지가 마치 한없는 깊이를 가진 듯 물과 먹이 흐르는 공간이 된다니, 어쩐지 나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P94
삼촌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 피를 홀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P102
인주도, 자신의 피가 먹이 되어서 종이 속을 흐른다고 느꼈을까. 멎지 않는 피처럼 시간의 혈관을 더듬어 간다고 느꼈을까.- P103
모르겠다. 네가 왜 갑자기 이 일을 한 건지. 대체 왜.- P103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그림을 인주는 그렸다.
삼촌의 그림과도 닮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P103
인주의 그림은 너무 어둡고 탁해, 가까이서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반면 삼촌의 그림은 멀리 떨어져 서서 전체를 파악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비슷한 점도 있었다.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 이 세계에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제야 그것이 이 세계에 부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어떤 것을 그린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을 구체적인 공통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P103
인주의 그림은 초월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림 속의 사람과 나무는 마치 검은 불꽃들처럼 타올랐다. 팔과 다리, 가지와 뿌리가 투쟁하듯 화면의 다른 끝을 향해 뻗어나갔다. 격렬한 그 불길을 타고 하늘과 땅이 맺어졌다. 검은 피로 범벅이 된 그 결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 그림들을 오래ㅡ충분히 오래ㅡ바라보고 나면 예상치 못했던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촌의 그림에 배어 있는 침묵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P104
인주의 그림과 비교한다면, 삼촌의 먹그림은 계단 없이 천장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육체 없이 태어난 그림, 혹은 육체의 과정이 완전히 제거된 뒤 정신만 남은 그림이라고 할까. 별들은 하얗게 타올랐지만, 그 불꽃에는 어떤 고통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은 고통너머에 있거나, 그것이 무화되는 곳에 있거나, 엄청난 밀도로 응축돼 보이지 않게 되는 곳에 있었다.- P104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데, 어떻게 서로의 입술을 찾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따스한 입속에서, 갓 태어난 물고기같은 혀들이 어떻게 더듬어 헤엄쳐 다녔는지 모른다.- P112
빛도 형체도 부피도 없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질량과 자력을 가진 검은 구멍들이 은하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영원히 멈춰 있거나, 영원히 연장될까. 검은 구멍의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형체를 늘어뜨리며 빨려들어간 죽은 별은, 마침내 구멍의 심장부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만나게 될까. 부피 없이 뭉쳐진 전 세계의 그림자를, 무자비한 암흑의 총량을 통과하게 될까. 수억년 전에 폭발한 별의 형상이 어둠의 핏속을 더듬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죽은 별의 몸이 검은 구멍 속에서 겪는 것은 무엇일까.- P114
삼촌의 흰 별이, 아니, 인주의 흰 별이 검푸른 먹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오래전, 삼촌의 방을 나오면서 뒤돌아보고는 저건 보석 같아. 하고 중얼거렸었다.
물의 결정이자 불의 한순간.
0과 무한.- P114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오고, 미처 들여다보기 전에 바스라지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짧은 틈마다 흰 별이 먹 속에서 타오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두 눈에 고였다 사라질 때마다, 이지러졌던 모든 사물이 얼음처럼 선명해진다.- P114
두렵다.
두렵지 않다.
아니, 두렵다.- P115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실형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건이란 진술되기 나름이니까요.- P119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된다면, 그런 단어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입술을 열어 그걸 발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형상이 하나의 결정, 단 하나의 점으로 응축된다면, 그때는...- P122
소리 지르고 싶다. 튀어오르고 싶다. 꿈틀거리고, 퍼덕이고 싶다.- P125
치욕은 조용하다.
조용한 우물 밑을 들여다보듯 나는 치욕을 들여다본다.- P126
낮고, 지치고, 차가운 목소리.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목소리.
짓누르는 목소리.
숨을 조이는 목소리.- P127
살려줘. 누구에게인지 모르는 채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캄캄한 구멍들이 벌집처럼 뚫린 건물들도, 수십 미터 허공에 멈춰 있는 부계도 한 겹의 껍데기였다. 심장 박동이 멈추는 동시에 꺼져버릴 거품이었다.- P129
거대한 얼음에 실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택시는 끝없이 원을 그리는 것 같았다.
영원히 그 새벽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P129
흉통이 처음 심장을 찔러왔을 때.
처음으로 죽음과 생명이, 세계와 내가 대등해졌을 때.
흔들리던, 깜박이던 목숨의 촉이 끝내 끊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삼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단 한순간.
아주 짧게.- P134
내가 그 일을 할 겁니다.
서인주라는 이름을 불멸하게 할 겁니다. 서인주가 가진 건 단순한 미술적 재능만이 아니었습니다. 신화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그 여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 그 여자를 신화로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 내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재산 이상의 것을 바쳤습니다. 앞으로도 바칠 겁니다.- P136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을 끊는다. 뚫을 듯 내 얼굴을 쏘아본다. 감정을 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오히려 강한 감정으로 읽히는 표정이다.- P136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P137
모든 일이 막힘없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그 여자를 불멸하게 할 겁니다.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해하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P137
나는 압도되지 않았다. 그의 광기와 고통, 집착에 압도되지 않았다.- P137
일반상대성의 원리대로, 물질의 질량에 비례해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면ㅡ그게 행성처럼 거대한 것들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면ㅡ타인의 몸 주위로 구부러진 공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구부러진 공간 속으로 타인을 불러들였다 내보내곤 하며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리라고.- P139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파동이 그 휘어진 공간의 경계까지 퍼져나가는 거라면ㅡ그 경계의 윤곽을 아우라라고 부르는 거라면ㅡ삼촌의 그걸 아마 나는 느껴보았다고. 눈도 귀도, 코도 살갗도 아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각으로.- P139
삼촌의 몸과 내 몸이 아직 닿아본 적 없을 때, 손끝 한번 스쳐보지 않았을 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 낮고 연한 그 파동을. 한없이 따스한, 부드러운 공기의 기척을. 똑같은 감각으로 강석원의 그것을 느낀다.
좁은 탁자를 건너 내 얼굴까지 번져온 오싹한 기척을. 살기, 억제된 고통, 끈적이는 슬픔으로 얼룩진 덩어리를.- P140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는 숨을 멈춘다. 이 남자는 어떤 형태로든 인주를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인주의 남모르는 근심, 오래 곪은 환부였을 것이다. 연인이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든, 절반의 사실이든, 전혀 사실이 아니든.- P141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본다. 모른다면 그는 인주의 남자가 아니다. 인주의 허벅지를 관통한 것이 무엇인지, 이십 년 동안 인주의 다리를 절게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흉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면.- P142
우우우 바람이 소리친다. 반소매 흰 체육복이 펄럭인다.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린다. 창 같은 장대가 손아귀에서 휘청인다.
세차게 장대를 꽂는다.
튀어오른다.
날아오른다.
허리가 거꾸로 호(弧)를 그린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지 않는다. 넘는다. 넘지 못한다. 소리친다.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는다.- P143
확신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죽었어. 썩어서 사라졌어.- P144
형상도, 소리도, 빛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초에, 양자역학적으로 진동하는 혼돈이 있었다. 확률적인 한순간이 찾아와, 10^-43초의 침묵을 뚫고 존재가 뛰쳐나왔다. 시공간이 씨앗처럼,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소금 한 알처럼 던져졌다. 그 소금이 충분히 부풀 때까지 빛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밀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원소들이 서로 몸을 부딪쳐 응결됐다. 불에 싸여 태어난 별들이 전속력으로 회전했다. 은하가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시작했다.- P148
원시 지구는 끓어오르는 별이었다. 붉은 마그마가 바다를 이루며 넘실댔다. 마그마의 열기 때문에 증발해 올라간 원소들이 허공에서 결합했다. 태고의 비가 지상에 뿌려졌다. 펄펄 끓는 비였다. 아무리 비를 맞아도 마그마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수천만 년을 변함없이. 끓는 비는 내리고 마그마의 바다는 일렁였다.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자 서서히 비가 식어갔다. 비를 맞은 지구도 함께 식기 시작했다. 생명체가 생길 수 있을 만큼 지구가 식는 데 수천만 년이 더 걸렸다. 수천만 년의 비와 수천만 년의 불이 만나 끓어오르는 증기를 뿜었다.- P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