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가 제각기 다른 것처럼 곤충들도 제각기 언어가 다르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아니 어쩌면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든 곤충이든 관계없이 언어가 달라도 먹이를 주면 자기편이 된다는 본질적인 특성은 크게 차이가 없는 듯하다. 식욕이라는 게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을 위한 공통된 욕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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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개인적으론 처음 보는 생소한 용어가 하나 나온다. ‘에그레고르‘ 라는 용어인데, 본문에 나오는 뜻 외에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무리를 지으려는 속성을 뜻한다는 얘기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와 관련하여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게 되었다. 본문에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솔직히 누가 한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선 누가 얘기 했다는 것보다는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어떤 가치관이 더 중요한 것이다.
독자인 나는 인간의 이기성으로 인해 집단을 위해 자신을 갈아넣으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좀 더 현실에서 많이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솔직히 이것이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배제하고 솔직히 이상적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집단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서 성과를 내고 그 결과물을 공평하게 또는 성과에 기여한 만큼 나눠먹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선에 더 가깝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집단이 이룩한 성과를 자신이 기여한 바에 따라 나눠먹기보다는 어떤 권력이나 여타 다른 힘 또는 관련 제도들의 미비 등으로 인해 공정하지 않게 분배되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된다.
대학교에서 팀 프로젝트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로 ‘프리 라이더free rider‘ 라는 것이 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그닥 기여하지 않았지만 단지 팀에 속해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팀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인한 혜택만 쏙 빼먹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 자신은 좋을 것이다. 자기는 일 안하고 남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를 쪽쪽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프리 라이더‘ 들에게 자신의 노력을 온전히 빨아먹힌 선량한 학생들은 힘은 힘대로 들지만 결과물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자들과 똑같이 받아가기에 그로 인한 허탈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분노할 수밖에 없다. 프리 라이더들이 내가 한 노력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집단주의는 공정한 분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현실에서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노력과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한 단순히 인간의 선량한 양심에 의지하는 신뢰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선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선 선하지 않은, 상대방을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잠시 얘기가 곁길로 많이 샜는데,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저자가 어떤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상은 꿈일 뿐, 결코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먹이야말로 곤충 세계의 가장 확실한 공통어인 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긴 것이다. 그 긴 인생을 우리는 얼마나 창조적으로 살아왔던가! 창조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너무 쉽게 파괴적인 삶 쪽으로 쏠려왔던 것은 아닌가!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위대한 <신비>를 깨우친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것을 느낀다. 맨 먼저 힘겨운 에움길을 무작정 달린다. 어둠 속을 나아가는, 불안하고 끝없는 행로이다. 그다음에는 종말을 앞두고 공포가 절정에 달한다. 전율, 부들거림, 식은땀, 격심한 공포가 지배한다. 그 단계가 끝나고 나면 바로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을 향해 올라간다. 눈에 경이로운 빛이 비치고 영혼은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결의 땅과 풀밭을 지난다. 성스러운 말들이 신심을 일깨운다. 깨달음을 얻은 완벽한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신비>를 찬양한다.
이젠 도저히 못 참겠다. 용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 세계는 정말이지 너무 기이해서 견딜 수가 없다.
여기에서 의식(意識)이 끝납니다. 무의식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끝까지 가봅시다!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노인은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부족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자기의 죽음조차도 의식을 못 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을 슬퍼한다. 살았더라면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 아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앙드루에 뒤 세르소는 많은 건축가를 배출한 프랑스의 가문이다.
때로는 현실이 꿈보다 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네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먼저 네가 그 약점을 극복해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네 의지력이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우리에겐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 대해서 짐승이 되는 것일까?
로제타석(石)은 원래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나일강 어귀의 로제타에서 발견한 비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뒷날 이 비석은 이집트 글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열망이란 그들(개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홀로 계속 나아갈 수 없는 때가 오리라
적이 너의 어떤 부분을 유달리 자주 공격하는지 보거라. 그곳이 대게 그 자의 약점이니라...
우리 머리 위에 깨뜨릴 수 없는 바위가 있다더니.
개미들은 파시스트들도 무정부주의자들도 왕정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냥 개미입니다. 그들의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은 우리 것과 다릅니다. 또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 그들 세계의 풍요를 만들어 내는 것일 테고요.
독일 학파와 이탈리아 학파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미들을 <인간의> 이해 체계 속에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석이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을 개미들의 삶과 비교하여 이해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개미의 이체동종(異體同種)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본 사람, 티베트 사람, 인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문화, 음악, 철학에 홀딱 반하고, 우리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왜곡하기도 하지요. 우리 지구의 미래는 이종교배에 있음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고 서로를 완성시켜야 하며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도망갈 방법도 없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고 말 것입니다.
에그레고르 ...(중략)... <동아리>의 정신적인 자산이라는 뜻이지. 하나의 냄비에 자기 힘을 쏟아서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수프를 만드는 것과 같지...... .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힘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둑이 있게 마련이라네.
여기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습니다. 땅속에서 작은 동아리를 이루어 사는 마당에 개인적인 욕심을 가질리가 없는 거지요...... .
그리고 우리는 점점 말을 적게 합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게 되거든요.
여기에선 뭔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아직 통제하지도 못해요.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여정의 중간에 있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 작은 공동체가 여러분들 마음에 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801호가 기진맥진한 채로 자기 도시에 다다른다. 그가 해 냈다! 그가 해낸 거야!
세계는 복잡성을 지향하고 있다. 수소에서 헬륨으로, 헬륨에서 탄소로. 끊임없이 복잡해지고 끊임없이 다단해지는 것이 만물이 진화하는 방향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행성 가운데 지구가 가장 복잡하다. 지구는 자체의 온도가 변화할 수 있는 지대에 들어 있다. 대양과 산이 지구를 덮고 있다. 생명 형태의 다양성은 거의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지력으로 다른 생명들을 압도하는 두 종류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개미와 인간이다.
신은 지구라는 행성을 어떤 실험을 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어느 쪽이 더 빨리 가는가를 보려고 완전히 상반된 철학을 가진 두 종을 의식의 경주 위에 던져 놓았다.
그 경주의 목표는 아마도 지구적인 집단의식에 도달하는 것일 게다. 즉, 그 종의 모든 뇌를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의식의 경주가 나아가게 될 다음 단계이고 복잡성을 지향하는 진화의 다음 수준이다.
선두에 선 두 종은 비슷한 발전 경로를 걸어왔다. 지능을 발달시키기 위해 인간은 괴물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뇌의 크기를 부풀렸다. 장밋빛이 도는 커다란 꽃양배추 같다. 똑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개미들은 수천개의 작은 뇌를 아주 미묘한 의사소통 체계로 결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개미들의 양배추 가루더미와 인간의 꽃양배추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재료나 지능 면에서 동등하다. 경쟁은 막상막하이다. 그러나 지능을 가진 두 생명이 나란히 달리지 않고 협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을 잘 다스리면 화재를 막을 수 있고 빠르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해주지.
개미들은 격자창을 통해서 보듯이 사물을 본다. 생식 개미들은 색깔을 감지하기는 하지만 모든 색깔이 자외선 쪽으로 옮겨진다.
개미들은 다리 하나마다 2개씩의 발톱이 달려있기 때문에 12를 한 단위로 해서 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