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일흔아홉 번째 책.
★★★★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단편 여섯 편이 실려 있다.
가장 놀랍고 감탄했던 건 작가가 인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주는 방식. 보통 심리 묘사가 훌륭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는 그것 이상을 해낸다. 작가는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석한다. 인물의 심리가 어떤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어떤 심리를 이끌어오는지, 그 흐름의 인과에 독자는 인물들의 행동이 아무리 뜬금없어도 설득이 된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라는 평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아찔한 비밀>은 어머니의 외도를 막으려는 어린 아들 ‘에드거’의 고군분투를 통해 아이의 성장을 그린다.
아이들의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장’이란 단어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아우른다. 에드거의 경우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봄으로서 유아기를 벗어난다. 그가 목도한 현실은 수많은 거짓말이 아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운(105쪽)’ 현실이다. 아이는 선을 넘어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는 엄마와 난봉꾼 남작과의 비밀을 남몰래 공유함으로서 완성된다. 에드거는 이 순간을 통과하며 아이로서의 소외를 벗어난다.
자기들이 쉬쉬한다고 아이들이 정말 모를 거라 여기는 어른들의 판단이 재미있다. 그건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어른들의 바람일 것이다. 조심성 없는 어른들을 통해 아이는 어른들의 삶에 노출되고, 부모에게는 ‘내 자식’이 아닌 경계 밖의 타인이 된다. 연애에 방해되는 아들을 밀어내는 엄마의 모습엔 양가감정이 읽힌다. 엄마의 비밀을 아빠에게 함구함으로 아이는 엄마와 공모하지만, 이로써 권력이 역전된다. 성장한(엄마의 약점을 빌미로 한) 아이는 어느새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결말에 드러난 여성성이 시대적 특성을 보여는 것 같아 주목된다. 에드거의 엄마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접고 결국 현실에 주저앉는다. 이는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가정과 아이의 보호자, 남편의 반려자, 주인공이 아닌 조역, 배경으로서의 위치로 전락함으로 읽힌다. ‘쓰고도 달콤한 짐(106쪽)’은 모성에 대한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포함하는 양가적인 표현이다.
<불안>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도발적인 오프닝의 위기감이 다른 형태의 자극이 되어 서스펜스를 한 가득 이끈다. 오늘날 ‘서스펜스 심리 소설’의 씨앗이 풍부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흥미를 가졌을 법한 이야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썼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조종하는 양상이 재미있다. 이야기의 주된 핵은 ‘불륜’을 저지른 ‘이레네’가 죄를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이다. 이 작품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갖는 내면의 불안은 실제 처벌보다 더욱 혹독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독교인이라면 참회와 용서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테지만, 요즘의 현실은 어떨까. ‘양심’이란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란 감정이 아무 소용없는 시대에, 후안무치, 파렴치한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 이 작품의 시대성이 드러난다. 그때엔 최소한의 양심이 자구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엔딩에 반전이 있다. 이레네의 갈등은 해소되는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남편은 음흉한 속임수로 이레네를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그것은 폭력과 다름없어 보인다. 결말이 드러나면서 이레네의 죄는 남편에게 전이된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악당은 과연 누구일까. 남편의 의도는 정말 순수한 걸까. 아내를 지키기보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가장 우선이었을 남편의 의도는, 당시의 남녀 지위, 그들에게 주어진(혹은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경계 등을 짐작하게 한다.
불륜과 협박으로부터 벗어난 이레네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 가정 안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으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여성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거의 한 평생 남자를 짝사랑하며 행복의 모든 기회를 차단하고 스스로를 우울의 벽에 가둬 불행하게 살던 여인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를 몰라준 남자에게 진실을 알리며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복수가 아니라고? 여인이 남자에게 정말로 바랐던 것은 무얼까. 남자의 아이를 몰래 낳고 살던 여인은 아이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진실의 칼날을 벼린다. 여인이 자기 말대로 남자를 정말로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원한 건 분명해 보인다. 남자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과연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파괴적인 광기(200쪽)’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를 남자에게 알림으로서 그를 지옥에 가두려 한다.
이야기의 화두가 ‘모성’이라는 사실에, 앞의 두 작품과 같은 맥락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여자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몰래 낳아 키운 아이가 죽자 폭발한다. 그 동안 잘 숨겨왔던 진실을 드러내고 생을 등지기로 결심한 동기엔 아이의 죽음이란 사건이 있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여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가 남자가 남긴 유일한 것이어서, 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존재 자체에만 의미를 둔다. 이런 심리엔 여성은 곧 모성이라는 사고가 작용한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교육에 힘쓰라는 무언의 시대적 요구가 읽힌다.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중편 분량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삶일까 정신의 삶일까.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양쪽에 적절히 배치시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다. 눈 먼 노인은 정작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순수한 기쁨(256쪽)’을 위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그런 동안 남은 식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방치된다. 그의 아내와 딸은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노인의 수집품을 몰래 판다. 노인의 핸디캡을 이용한 속임수를 동원해 위작과 빈 종이로 대체된 컬렉션이 여전히 노인에게 기쁨이 된다는 설정은 작품에 아이러니와 묵직한 페이소스를 부여한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노인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노인을 속인 아내와 딸의 기만은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삶의 의미와 정직이라는 가치, 신뢰 등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인을 위해 핑계 하나를 대자면, 화자를 만나 자신의 수집품 소개에 열을 올리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무척 공감을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의 진가를 함께 알아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지음(知音)’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연예인의 ‘팬덤’이 존재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수집가는 단순히 물건을 소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향유하는 건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주는 기쁨만이 아닌, 그것들마다 새겨진 스토리, 기억, 추억 같은 정신적인 어떤 것, 무형의 것들일 테다. 우리가 타인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해 보인다.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도박에 빠진 생면부지의 젊은이를 구하기 위한 중년 여성의 처절한 노력이 그려진다.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이 읽힌다. 타인에 대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세, 즉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엿보여 재미있다.
‘C부인’의 동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자를 향한 연모나 애정은 나중에,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애초에 어떤 감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도 집을 떠난 C부인이 ‘빈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해도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을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구원자’이면서 ‘돌보는 사람’을 자처한 게 아니었을까.
다시 여성들의 모성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작품 속에 은연히 드러난 ‘돌보는 자’, 고난에 빠진 남성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구원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은 작가가 맹렬히 활동한 시기의 ‘바람직한 여성성’의 전형적인 롤 모델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은 오늘날 ‘초단편’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성경 속 ‘노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사회에 널리 퍼진 이기와 악, 폭력 등에 경종을 울리려는 이야기다. 전쟁의 트라우마, 이후의 우울증, 작가의 최후를 고려하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구촌 어디선가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 분쟁들을 생각하면 한층 더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로 읽힌다.
작품집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바람직한, 받아들여질 만한 여성들의 어떤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예전에 읽은 츠바이크의 두 장편, 성적인 면에서 도발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감정의 혼란≫과 노동자 여성이 사회의 구석구석 존재하는 계급 차이와 불균형을 목격하고 각성에 이르는 ≪우체국 아가씨≫에선 건져 올리지 못한 감상이라 무척 생뚱맞다. 이 작품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편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태도와의 차이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품집 속 여성 캐릭터들의 성격적 맥락과 여성들에 대한 대접을 근거로 작가를 여성 혐오자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성들의 시대적 한계, 그 세계를 지배하고 통용됐던 가치관의 모순 등이었다는 게 이 작품집 속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