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일흔여섯 번째 책.
★★★☆
1800년대의 미국.
초라한 무대에 오르지만 ‘제니’는 마술에 진심이다. 실력이 꽤 출중한 마술사로서 그녀는 자신의(그리고 모든) 마술을 설명이 가능한 속임수, 약간의 기술이 동원된 손재주로 간주한다.
어느 날 쇼를 끝낸 제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탐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제니에게 일을 제안한다. 당시 유명했던 영매(靈媒)인 ‘폭스 자매’의 비밀을 알아내 달라는 것. 많은 보수에 이끌린 제니는 그녀들의 강령회에 참여하여 은밀히 접근한다.
이야기의 중심엔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유물론자이고 회의론자인 제니는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밝히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된 제 신념을 흔드는 경험을 하고 난 뒤 태도가 살짝 변한다. 의심은 호기심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폭스 자매의 강령술을 속임수, 이단 행위, 사기 행각이라는 전제를 두고, 믿음(어쩌면 신앙)에 대한 사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향을 살짝 튼다.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강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것은 폭스 자매의 ‘딱’ 소리에 얽힌 비밀과 부딪힌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무엇을 가짜로 치부해야 하는지, 작가는 진짜와 가짜를 섞어놓으며 그 경계를 흐린다. 이런 혼란은 인물들의 대립 관계를 흐리게 만들고 그들을 상처 받고 슬픔이 많은 보통의, 동등한 인간들로 만든다.
아버지의 유품인 보잘것없는 마술 안내서에 집착하는 제니, 누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인가 증명하기 위해 대립하는 ‘로버트-윌리엄’ 형제,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쇼 비즈니스 계로 내몰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폭스 자매의 갈등은 서로를 위로하며 감긴 눈을 뜨게 도우면서 잦아든다. 모종의 종교 행위로 시작된 이야기는 각자의 마음속 묻힌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결말을 맺는다.
영혼 운운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야만의 찌꺼기라는 결론은 없다. 그것이 실재하니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없다. 이야기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데, 결국 아픔을 뒤로 하고 삶을 재정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동시에 ‘믿음(신앙, 종교, 뭐든지…)’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슬픔과 좌절의 나락에 빠졌을 때, 우리를 안아 일으키고 구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런 기능만 중시할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나아가 진짜 종교와 사이비의 경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 미신일 수 있지만, 테두리 밖에서 본다면 의심스럽게 보이는 건 거대 종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믿음이 내게 진정한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일 텐데, 그것이 만약 속속들이 거짓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를 지니고 좋은 결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일까 악일까.
사후 세계란 실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어떻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된 바도 없으니 어떤 말도 섣부를 테고, 유일하게 확인할 방법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일 텐데 그러기엔 증명하기에 너무 늦었으니, 우리 산 사람들은 결코 모를 일이다.
그런 걸 두고 있네 마네, 사기네 어쩌네 하면서 입씨름해봤자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체력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2011년의 영화, ≪디 어웨이크닝(The Awakening)≫과 구조가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영매들 ‘털기’ 전문인 여성 수사관이 으슥한 고성에서 진짜 유령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상당히 재미있다.
소재로 비슷하기는 ‘사라 페너’의 소설 ≪런던 비밀 강령회≫도 떠오르는데, 이 소설은 (내가 읽기에) 완전 개망, 폭망이다.
무당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신(2014)≫도 생각난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무교(武敎)’가 ‘무속(-俗)’이란 멸칭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토속 종교를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에 관해서라면 이 작품과 관련이 많다. 거대 시스템의 횡포라면 우리 영화 ≪불신지옥(2009)≫도 생각난다. 기독교 중심적인 시선으로 한 가정 내의 비극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족.
1. 작품 속 ‘폭스 자매’와 ‘로버트-윌리엄’ 형제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핑커튼 탐정 회사’ 역시 현재까지 존재하는 실제의 기업이다. 지금은 보안 업체에 매각되어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라고.
2.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여성 캐릭터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렸는데 작가는 남자다. 이런 발언도 차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