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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꽃님의 서재
  • 에티의 여름
  • 루시 스티즈
  • 17,550원 (10%↓970)
  • 2026-08-05
  • : 14,620

26년 일흔한 번째 책.


★★★

 

‘내셔널갤러리’ 안. ‘성찬’이란 제목의 그림. 13인분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그린 대작이다. 그림의 어두운 한 구석에 ‘에두아르 타르튀프’라는 화가의 사인이 보인다. 그 앞에 초로의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그 그림이 36년 전, 불에 전소됐음을 기억한다. 그녀 자신이 그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마주한 그림은 바로 그 그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짧은 프롤로그엔 이야기 전체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숨겨진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스포일러를 흘리기도 한다. 과거에 불에 타 사라진 그림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그건 뭐다?

 

시간을 거슬러 1920년. 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 사정이란 게 절대 수월하지 않다.

 

‘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타르튀프(타타)는 은둔한 화가다. 그의 작업과 생활 전반을 관리하며 돕는 사람은 그의 조카인 ‘실베트(에티)’. 두 사람의 조용하고 틀에 짜인 일상은 타르튀프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 기자 ‘조지프’의 출현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사실, 이런 표현은 조지프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그의 등장으로 타타와 에티 사이의 갈등이 좀 더 가시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 조짐은 벌써부터 존재해 왔다. 촌구석에 틀어박혀 집안일이나 잔심부름에 얽매인 삶이 젊은 에티에게 만족스러웠을까. 타타의 은둔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행동은 필요와 욕구에 의한 결과라고 볼 때, 타타의 은둔엔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독(毒)인 사람도, 약(藥)인 사람도 없다. 약을 주려고 했는데 독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타타와 에티는 서로에게 악당이고 은인이다. 두 사람을 삼촌과 조카가 아닌,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그 외에 양가적인 감정이 사이에 진득하니 흐르고 있는 어떤 관계로 상상해도 그림이 된다. 각자의 욕망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비틀리고 날카로워져 서로를 찌르고 만다.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사회 전반(특히 예술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차별로 발전시키다가 다시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와 폭발시킨다.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왔다’는 표현엔 다소 주저앉은 감상을 포함한다. 에티의 결말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면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타타가 ‘제 몸에 흐르는 피 같은’ 작품의 소실로 벌을 받았다면, 에티에겐 어떤 처벌이 가해졌나?

에티의 기만적인 (동시에 어리석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에 어떤 설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 있을까. 심리학 도구들을 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액면 그대로 본다면 에티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캐릭터 성의 시너지 효과로 에티의 행위에 동정과 연민과 더불어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쳐도, 결말에서 타타를 취급하는 작가의 방식엔 변명이 어렵다. 타타 역시 희생자고 피해자다. 어린 조카딸과 함께 촌구석에 처박힌 이유도 에티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화마에 희생된 일생의 작업물들을 생각한다면…. 예술가, 창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는 바로 타타가 아닐까. 그런데 결말에서 타타를 작가가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 그 사람이 아무리 악인이었어도 이야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퇴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고 마땅한 예의다. 하지만 작가는 그냥 타타를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밀어낸다.

타타에 대한 작가의 푸대접은, 에티와 조지프의 시점이 교차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구성에서도 보인다. 사실 조지프는 개인의 서사도 있고 중요한 인물인 척하곤 있지만, 불쏘시개 역할을 빼고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그보다 내면에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타타가, 이야기에 헌신하고 기여하는 정도만 보더라도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의 균형은 둘째치더라도, 에티와 조지프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타타의 모습은 독자로서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그 인물에게 뭔가, 드러나지 않은, 독자들만 볼 수 있는 내밀한 뭔가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에티는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 방법으로 푸는 대신 좀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이 피해자를 향한 이차 가해로 들릴까? 에티와 타타는 서로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맴도는 ‘우로보로스’처럼 두 사람의 갈등과 애증은 영원처럼 보인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행동에 나선다면 누구에게 수월했을까. 그림이 인생의 전부이고 은둔 생활에 비교적 만족하는 타타보다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에티에게 좀 더 많은 동기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 스스로도 절실히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폴 세잔느’, ‘페기 구겐하임’ 등의 실존 인물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폴 세잔느는 복잡하고 더러운 사생활로 파렴치한 악당 역할을 부여받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상상이랜다. 실존 인물에게 작가의 상상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오명을 씌워도 괜찮은가?

덕분에 작품은 역사 소설의 냄새를 살짝 풍긴다. 본격적인 시도는 아니고 약간 그런 척만 한다. 출판사는 로맨스+미스터리 장르로 선전하고 있던데, 로맨스로서는 너무 빤하고 미스터리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읽기엔 처절한 심리 소설, 싸이코드라마에 더 가깝다. 타타와 에티의 소설 속 심리를 다룬 에세이나 소설 비평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고 싶다.

 

사족.

 

온라인 서점의 이 책 페이지를 보면, 책 소개보다도 작가 소개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뭐, 신인 작가라 그럴 수도 있지만, 책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혹은 할 말이 많지 않으면) 작가 홍보로 때우나, 그런 생각 잠깐.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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