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예순여덟 번째 책.
★★★☆
환갑을 앞두고 때 아닌 죽음을 맞은 국어교사 ‘정윤옥’의 삶을 그린다.
교사로서 윤옥은 투사에 가깝다. 전교조 가입으로 해임됐다가 복직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원대한 꿈을 함께 품었던 동료가 육욕에 굴복하고 돈과 명예에 변절하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료 교사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단단하고 꼿꼿한 원칙주의자고, 거의 모험에 가까운 수업으로 학부모들의 원성을 듣지만 무시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개인으로서 윤옥은 슬픈 가족사를 지닌 비운의 주인공이다.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 ‘지호’를 포기하는 엄마를 방관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한 제자의 아이를 거두어 키운다. 정체가 모호한 시설에 떠맡겨진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은 윤옥의 일생을 지배한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과거의 속죄일 수 있다.
내겐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몇 명의 선생님이 생각나긴 하는데, 거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분들이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런데 그 시기에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적어도 어느 선생님이 친절하고 누가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 어리고 세상 모르고 행동과 반응은 굼떴어도 분위기를 읽는 건 빠르고 정확한 편이었으니까. (눈치가 빠르다고 뭐를 어떻게 반응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선생님이란 존재를 절대 좋아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떠나서 그들은 내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고 내 실패에 대해선 매우 엄격했다.
굳이 내 과거를 거울 삼지 않아도 윤옥이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일관된 모습뿐이라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 그 영웅적인 모습은 소위 교육계의 히로인, 어벤저스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아니, 이런 선생님이 있다고?
소설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위인에 가까운 인물임이 분명해도 정의와 올바름에 선다는 건 내게 일종의 각성이 되었다. 나, 자신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면 정의와 올바름에 마음이 기우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정의롭게 행동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기 위해선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미덕이 아님을, 내게 그것이 충분치 않음을 깨달을 때 수치스러워야 할까. 아니면 부러움?
이야기는 윤옥이 한 일보다 그녀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굉장히 바쁘다. 초반엔 산만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깊이는 없다. 큰 위험도 위기도 없다. 뭔가 일이 터질 만하면 운 좋게 잘 넘어간다. 다이나믹(dynamic)하기보다 파노라믹(panoramic)하다.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는 건데 교훈을 너무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불필요한 사건들도 많다. 적어도 윤옥은 왜 죽어야 했는지, ‘영숙’은 왜 자살한 건지, 등은 설명 내지는 이유가 필요하다. 출판을 위해 분량을 많이 줄였다고 하는데(목차 포함 244쪽), 지금보다 좀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이 작가에게 계기가 됐다고 하는데, 그 이슈를 정면에서 파고든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교권침해’, ‘학부모의 갑질’ 같은 이슈가 등장하긴 하는데, 다른 이슈들에 파묻혀 유야무야된다. 할 이야기는 많고 분량은 정해진(짧은) 탓에 진중하게, 사건의 드라마성을 차분히 다룰 공간이 없다. 오히려 ‘서이초’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책을 손에 드는 게 낫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한결같이 영웅 같은 면모를 무시하면) 작품은 꽤 읽을 만하다. 작품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그게 이야기에서 나온다기보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윤옥에게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는 여전사의 기개에 가까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간결하고 안정적인 문장이 눈에 착 붙는다. 윤옥의 죽음을 서두에 두고 그녀의 삶을 되짚는 세 장(chapter)의 구성도 적절해 보인다. 초반의 산만함은 오륙십 쪽을 넘어서며 질서를 찾아간다. (대사는 살짝 오골오골하다) 교육 현장에 관한 디테일이 상당하다. (그 바닥을 전혀 모르므로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작가의 본업이 교사이니 아마도 실제 지식과 경험에서 온 디테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주인공이 아닌, 학교가 무대가 아닌 소설도 작가가 잘 쓸까, 이런 의심 살짝 해본다.
결말에 대해서.
윤옥은 자신이 치른 전쟁에서 이겼을까. 그건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르다. 여러모로 이런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윤옥의 상대는 거대한 시스템과 삶 자체였다. 결과를 떠나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빛난다. 윤욕은 용감했고 자신을 희생했고 행동하며 버텼다. 삼가 정윤옥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제13회 (2023년)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