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때 오만과 편견을 읽은 이후로 ‘제인 오스틴’은 오랜만이다. 영화로 본 『이성과 감성』과 영미 여성작가 앤솔러지 ≪그녀들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 <세 자매>는 열외로 친다.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책들을 소재로 한 『제인 오스틴 북 클럽』은 영화로, ‘오만과 편견’을 좀비 활극으로 패러디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책으로 읽었지만 기억도 안 난다.
다작한 작가도 아니고 활동 시기가 긴 것도 아닌데다 무려 300년 전에 살다 간 작가이다 보니,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물론 해외엔 ‘오타쿠’라 불릴 만한 열혈 팬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웬 호들갑?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로맨스를 좋아하지도 않고 대표작은 이미 읽었으니 그 이상으로 내가 작가를 접할 기회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은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표지가 예뻐서?
총 2부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다양한 성격과 관점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로맨스 성격이 강하다. 2부로 들어서면서 고딕 소설의 분위기가 살짝 보태지는데, 이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난다. 제목인 ‘노생거 수도원(Northanger Abbey)’은 중반 이후, 주인공인 ‘캐서린’이 ‘틸니 가족’의 초대로 방문하게 되는 그들의 영지로, 고딕 소설을 위한 훌륭한 무대가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이 있는데, 여성 참정권도 없던 시절(이 책의 원고가 완성된 게 1799년, 출판은 1817년), 작가가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작품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경제권을 포함한 삶의 거의 모든 요소들을 남성들에게 의지해야 했던 당시 여성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 보인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에피소드나 대화들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특히 당시 결혼을 앞둔 여성들의 ‘지참금’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또 하나 놀랐던 점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상당히 도전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습작을 제외하고 출판을 목표로 작가가 완성한 첫 작품(비록 출판은 나중에 이뤄졌지만)이라고 알려져 있다. 소위 ‘입봉’도 하지 못 한 작가가 당대 유행하던 로맨스 소설과 고딕 소설을 비판하고 장르적 클리셰들을 비틀고 있으니, 걸음마도 못 뗀 갓난쟁이가 마라톤을 하려고 달려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용기와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게다가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화자 자신을 드러내 독자들에게 말을 걸면서 ‘제 4의 벽’을 허물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가 전적으로 허구(소설)임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주로 로맨스 장치에서 나온다. 주인공의 짝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통속적인 장면들에 숨겨진 날카로운 질문들, 다양하고 입체적인 성격의 인물들과 배반, 뒤통수, 횡설수설과 모함이 난무하는 그들의 관계가 주는 흥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모습과 생활, 유행, 풍속들을 엿보고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보인다.
고딕 소설로서는 어떨까. 작가가 이 작품을 고딕 소설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위에 적은 ‘고딕 소설로서 어이없는 해프닝’이라는 표현은 일단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 이런 장면들은 나중에 ‘틸니 장군’의 성격과 모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복선이다. 작가는 고딕 장르를 비판하면서 모방하고 이용한다.
책은 살짝 옆으로 두고, 나로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시도였다. 현실적인 주인공과 현실적인 이야기, 과장되고 이런저런 액세서리들을 제거한 담백한 이야기, 거기에 작가 제인 오스틴의 인간적인 매력까지. 예상 외로 얻어가는 게 많았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떤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궁금하고 아쉽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