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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꽃님의 서재
  • 바질 정원에서
  • 한수영
  • 12,600원 (10%700)
  • 2023-04-28
  • : 66

❝세 사람을 흔들어 깨운 종소리가 시월의 정원으로 퍼져갔다. 화로 속의 식어버린 재는 내년 봄 정원에 뿌릴 좋은 거름이 될 거였다. 뿌리와 뿌리 사이에 스며들어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해줄 거였다. 바질 향이 흔들렸다. (<바질 정원에서>, 37쪽)❞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이 모여 원이 되듯 우리도 그럴 거라는 것. 인생이라는 원의 크기는 저마다 달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인생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을 거라는 것. 어떻게 있든, 무엇으로 있든 누구나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 (<파이>, 91쪽)❞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표제작, <바질 정원에서>엔 오십 평생의 반 세월동안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준 세 여자의 취중한담이 전개된다. 수다와 기억으로 일관된 이 작품은 긴 세월 세 여자의 우정과 애정을 조망한다. 이들에게 갈등과 반목의 순간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조차 ‘내년 봄 정원에 뿌릴 좋은 거름(37쪽)’이다. 좋은 관계와 아름다운 삶은 예측하고 계획되고 단계별로 실행되는 것이 아닌, ‘잘못 울린 종소리’처럼 우연일 뿐인 것 같다.

현실과 과거를 병치시키고 중첩시켜 진행하는 구성은, 아내로 엄마로 여자로 위기에 빠진 화자의 이야기인 <파이>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퀴즈쇼 현장의 긴장감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화자의 회상에 탄력을 더한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오독과 오해가 가득한 세상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아내려는 화자의 안간힘, 타인과 연결되려는 처절한 몸짓이 인상적인,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반면 <울>의 ‘기옥’은 세상에 속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타인에 좌절한다.

 

균열을 그리는 세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랑의 지점>에서는 낭만적 설렘에서 시작해 배반을 거쳐 관계에 위기를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의 말>에서는 친근했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신뢰에 의심이 들러붙어 머릿속에 안개가 드리워지는 순간을 그렸다. 해외 이주 노동자를 등장시켜 명쾌한 소통을 어렵게 하는 ‘언어’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지금 어디쯤이에요?>는 일상의 균열과 불안을 그리는데, 절도 사건의 피해자에서 직접적인 가해자(복수자)로의 변모가 부러움이나 질투가 원인일 수 있다는, 그리고 이는 화자의 심리 저변에 흐르는 모친과의 갈등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부딪히는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감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 외, 병상에 누운 노년의 여인이 자신의 지난 굴곡진 삶을 구어체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만조유생>, 폭력과 증오의 상관관계를 말한 듯한 <달개비 꽃> 등이 실려 있다.

 

서점을 떠돌다가 우연히 읽게 된 책이다. 난 이런 걸 ‘탐험’, ‘발굴’이라고 표현하는데, 말 그대로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기웃거리다가 좋은 책,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거다. 그야말로 ‘케바케’, ‘복불복’이다. 진짜 백 퍼센트의 운이고 절대 우연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이 만남이, 그 책이, 읽는 행위가 아주 특별해진다.

 

문장이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이야기가 물 흐르듯 한다. 작품마다 개성이 있고 각 캐릭터들의 차별화가 잘 되어 있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렌즈에 경험이 묻어 있어 관록이 느껴진다. 작가는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얼마 전에 읽었던 ‘이수안’ 작가와 함께 지루했던 나의 책읽기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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