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정이현’의 작품집.
인간, 이웃,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창동’의 영화, ≪시(詩)≫를 생각나게 하며, 선명한 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외면함으로서 그 동안의 모든 배려와 선의를 위선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의 이야기인 <빛의 한가운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희미한 깜빡임조차 없는 어두움 속에서 끝내 마주해야 할(153쪽)’ 예감은, 살면서 계속 죄책감과 양심에 시달릴 ‘안희’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역시 양심의 이야기이면서 인물을 궁지로 몰아가는 설정이 숨막히는 <선의 감정>도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형벌을 받는 주인공의 결말은 곱씹을수록 섬뜩하다.
고립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을 은유한 <단 하나의 아이>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존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187쪽)’ 타인의 존재는 일말의 희망으로 보인다.
삶에 대한 치열함 마저 ‘급’이 있고 욕하는 것에도 ‘태도’가 있다는 <실패담 크루>는 계급과 ‘아비투스(habitus)’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혔다. 이야기 자체보다 구상의 근원이 된 아이디어, 작가의 의도가 신선해서 기억에 남는다.
성실함의 대가가 항상 만족스럽지 않다는 씁쓸한 결말의 <언니>는 이야기 자체보다 캐릭터가 매력적인 작품이었고, 폭력에 대한 대응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는 <가속 궤도>도 좋았다.
그 외, 타인에 대한 신뢰의 한계를 물으며 그것이 일종의 신화(神話)가 아닌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이모에 관하여>와 <사는 사람>, 일종의 러브 스토리로 우왕좌왕하는 포커스가 산만했던 <우리가 떠난 해변에> 등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