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에 의한 트라우마, 별거, 공황발작, 광장공포증. 주인공 ‘애나’가 집에 갇힌 이유다.
애나는 언제나 약에 취해 있고(공황장애 치료제를 무슨 사탕 먹듯이 한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와인을 마신다. 누가 봐도 믿음직한 주인공은 아니다. 이런 애나가 심심하고 무료해서 이웃들을 엿보는 재미를 들이는데, 집 앞 공원 건너에 새로 이사 온 이웃집 창문을 통해 살인으로 추정할 만한 장면을 목격한다.
작가는 초반에 이런 설정을 촘촘하게 깔고 있는데, 이게 뻔하면서도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에 초석을 단단히 다지고 있는 거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거기다 애나의 취미가 흑백 고전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이니, 애나가 심심찮게 언급하는 영화 제목만 보면 이야기의 전말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작품을 읽다보면 십수 가지 영화나 소설이 떠오른다. ≪이창(Rear Window)≫, ≪현기증(Vertigo)≫, ≪숙녀, 사라지다(Lady Vanishes)≫, ≪너무 많이 아는 남자(the Man who Knew Too Much)≫ 등의 히치코크 영화부터 ≪디아볼릭(les Diaboliques)≫, ≪바디 더블(Body Double)≫, 소설 ≪이제는 없는 여자(Celle qui n'était plus)≫, 최근의 ≪셧 인(Shut In)≫, 기타 등등.
이 책의 줄거리는 위에 언급한 영화와 소설들의 총합이다.
이쯤 되면 지루할 게 분명한데, 술술 잘 읽힌다. 장르 특유의 분위기를 잘 잡고 있고 현대적 배경에 스며든 고딕 소설의 풍미도 적절하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앙상블도 훌륭하고 특히 대화가 맛깔스럽다. 주인공을 오히려 의심스럽게 만들어 중후반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방식도 쓸 만하고 그런 주인공을 서서히 위기로 몰아넣는 것도 잘 했다. 의외의 결말에 한 마디로 이 장르 특유의 긴장과 서스펜스를 끝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 소설에서 이것 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무엇보다 작가가 무척 능란하다. 특히나 이 장르에 대한 작가의 애정,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영화, 소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 상상하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소설을 너무 쉽게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수많은 레퍼런스에서 핵심만 뽑아 짜깁기한 게 제대로 된 창작일까, 하는 의구심이 재밌는 이야기임에도 발목을 잡는다. 패러디니 오마주니 핑계를 댈 수 있지만 독창성, 오리지낼러티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결함은 이 작품의 숙명처럼 보인다.
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레퍼런스들 덕이다.
이 작품이 지루했다면 그 이유도 레퍼런스들 덕이다.